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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휘 덕령)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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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14-11-05 08:16 조회4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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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장유사(金忠壯遺事) 5권 간본 ○ [기유년(1789, 정조13) 편찬]
친찬서(親撰序)
- 홍재전서 제183권 군서표기(羣書標記) 5 ○ 명찬(命撰) 1 -
공동산(崆峒山) 북쪽을 비추는 싸늘한 별빛 같고, 협객 형가(荊軻)의 비장한 노래처럼 쓸쓸하고도 비통하면서도 한 사람이나 한 가문(家門)의 문헌(文獻)에서 그치고 말 수만은 없는 것이 이 책이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말과 사공(事功)이 모두 이 책 속에 기록되어 있으니 내가 그에 대하여 중언부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굳이 말한다면 그의 말과 사공의 근원에 대하여 말해 보겠다.
대체로 어쩌다가 현인(賢人)이 되기도 하고, 모이고 모여서 걸출한 이를 만들기도 하는 것은 모두 기(氣)의 작용이다. 말과 사공도 모두 기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그 기가 때를 만나 크게 쓰이게 되면 그 공로가 기상(旂常)에 쓰여지고 정이(鼎彝)에 새겨지며 혜택이 당대에 미치고 실적(實績)이 역사에 전해지는데, 그때는 말이 곧 일이고 일이 곧 공이다. 더러 불행해서 기(氣)와 시(時)가 서로 어긋나게 되면 펴 볼 기회를 갖지 못한 채 뭉쳐진 것들이 더러는 말로 표현되고 더러는 문자(文字)로 표현되기 때문에 그가 시행하지 못한 사공의 계획을 그 말이나 문자를 통하여 만분의 일이나마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가전(家傳)이 국사(國史)보다도 중요한 경우가 있으며, 지사(志士)와 영웅(英雄)이 더더욱 눈물을 금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 충장공(忠壯公) 같은 이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불행했는가. 그가 태어난 시기는 국운이 전성기를 맞은 선묘(宣廟) 때였다. 그 당시 배출된 인재는 거의 십인의 난신(亂臣)이 나왔던 무왕의 시대와 같았다. 이러한 시대에 뛰어난 용력과 세상을 다스릴 만한 재목으로 칼을 짚고 초승군(超乘軍)을 통솔할 때에, 익호장군(翼虎將軍)이니 충용장군(忠勇將軍)이니 하여 조정에서 얼마나 그를 중시하였으며, 적군(敵軍)에서는 또 참장군[眞將軍]이니 석저장군(石底將軍)이니 하며 얼마나 두려워하던 존재였는가. 가령 그 강대(剛大)하고도 세찬 기운을 조금이라도 부절(符節)과 영기(令旗)를 갖고 군사를 지휘하는 데 써 보았더라면 연연산(燕然山)에도 새길 만하고 능연각(凌烟閣)에도 화상을 그릴 만하였을 것이니, 용사(龍蛇)의 전쟁에 어찌 8년씩이나 치욕을 받았겠는가. 애석하다. 하늘은 그런 인재를 내렸는데 사람이 액(阨)을 주고, 재주는 타고났는데 쓰여지는 것은 인색하여서, 무목왕(武穆王)이 억울하게 탄핵을 받자 금(金) 나라 사람들이 술을 들며 축하하였던 그런 꼴이 되었구나.
그런데도 조화(造化)의 정기(精氣)와 산악(山嶽)의 번득이는 영기(靈氣)가 희미하나마 그가 남긴 말과 문자(文字)의 사이에 있어 백세(百世)가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말과 문자를 읊조리노라면 어렴풋이 그 모습이 그림처럼 나타나고 목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그것은 왜일까. 그가 참기운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또한 사공(事功)이니 어찌 따로 사공을 말하겠는가. 내가 보기에 이 세상에서 자기의 말과 사공이 후세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이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역사에 남아 있고 기록에 강렬한 빛으로 남아 있는 것이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그것을 보면 참다운 기운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이 책 또한 반드시 후세에 전해지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 이처럼 드문 일을 두고 내가 어찌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 《김충장유사(金忠壯遺事)》의 서문(序文)으로 삼는다.
김덕령(金德齡)은 전라도(全羅道) 광주인(光州人)이다. 그의 저서는 시문(詩文), 연보(年譜), 기전(紀傳)과 비찬(碑贊) 등 모두 3권이다. 그의 형 증(贈) 지평(持平) 김덕홍(金德弘)과 그의 아우 증 집의(執義) 김덕보(金德普)의 유적(遺蹟)과 유고(遺稿)를 이 책의 뒤에다 붙여 인쇄하여 세상에 내놓는다.

이상은 기유년(1789, 정조13)에 편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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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고(故) 충용장군(忠勇將軍) 김덕령(金德齡)의 시문(詩文)과 사적(事蹟)을 함께 엮은 것이다.
덕령(德齡)은 호남 광산인(光山人)이다. 임진왜란에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당시에 뛰어난 용기와 지략(智略)으로 제군(諸軍)의 으뜸이었는데, 전공(戰功)을 세우기도 전에 모함을 받아 죽었다. 그의 형 덕홍(德弘)은 그보다 먼저 금산(錦山) 전투에서 순절(殉節)하였고 아내 이씨(李氏)도 적을 만났을 때 적에게 욕을 하며 굽히지 않고 죽었으니, 남쪽 사람들이 말하는 한집안에 세 명의 충렬(忠烈)이 났다고 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열성조(列聖朝)에서 수차례 포증(褒贈)하였는데, 내가 무신년(1788, 정조12)에 호남 유생의 상언(上言)에 따라 덕령에게 충장(忠壯)의 시호를 내리고, 덕홍에게는 지평(持平)을 증직(贈職)하였으며, 그의 아우 덕보(德普)도 지행(志行)이 있었으므로 집의(執義)를 증직하였다. 선시관(宣諡官)이 돌아오면서 그의 집안에 소장하고 있던 유고(遺稿)를 가지고 와서 나도 보게 되었는데, 그의 글에서 밝고 빼어난 기상이 지면(紙面)에 흘러넘쳐서 그 사람됨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내각(內閣)에 지시하여 나누어 편집하고 교정하여 시문을 앞머리에 놓고 다음은 연보(年譜), 다음은 기(紀)ㆍ전(傳)ㆍ비(碑)ㆍ장(狀)의 순서로 엮고, 덕홍ㆍ덕보의 유적(遺蹟)을 뒤에 붙이도록 하였다. 이듬해 봄에야 책의 편찬이 비로소 끝났으므로 호남 감영(湖南監營)에 내려 보내 목판으로 간행하여 영원히 전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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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D-001]초승군(超乘軍) :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거느린 군대의 칭호이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權慄)이 도원수로 영남에 주둔해 있을 때에 김덕령이 군호(軍號)의 사용을 요청하자 초승군이라는 깃발을 쓰게 하고, 김덕령은 초승장군(超乘將軍)의 호칭과 초승사(超乘使)의 인장(印章)을 사용하도록 허락하였다. 초승(超乘)은 군사들이 날래어 말에서 내렸다가 뛰어서 탄다는 뜻이다. 《西河集 卷14 金將軍傳》 《宣祖實錄 26年 12月 29日》 《亂中雜錄 卷3 癸巳年下 閏11月 4日》
[주D-002]익호장군(翼虎將軍) : 임진왜란에 광해군(光海君)이 세자로서 전주(全州) 분조(分朝)에 있을 때 이정암(李廷馣)의 장계에 따라 의병장 김덕령에게 내린 호칭이다. 이는 날개 달린 범이라는 뜻으로 뒤에 임금이 듣고 과하다 하여 초승장군(超乘將軍)으로 개칭하였다. 《西河集 卷14 金將軍傳》 《海東名臣言行錄》
[주D-003]충용장군(忠勇將軍) : 의병장 김덕령에게 조정에서 내린 벼슬이다. 《宣祖實錄 26年 12月 30日》 《亂中雜錄 卷3 甲午年 1月 2日》
[주D-004]참장군 : 의병장 김덕령의 용맹이 적군에 알려지자 왜장(倭將)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은밀히 화공(畫工)을 보내어 화상을 그려 오게 하여 보고는 “참장군이다.” 하면서 군사를 거두고 조심하면서 쉽게 출정하지 않았다 한다. 《海東名臣言行錄》 《西河集 卷14 金將軍傳》
[주D-005]석저장군(石底將軍) :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의 별호이다. 석저(石底)는 전라도 광주의 마을 이름으로 김덕령이 태어난 곳이다. 왜적은 마을 이름인 줄 모르고 그가 돌 밑에서 나온 줄로 알고 두려워하였다 한다. 《海東名臣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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