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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공(휘 극성)이 수록된 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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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08-11-26 23:04 조회1,749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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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공(휘 극성)이 수록된 문집과 저자


* 虛白亭文集卷之四
碑誌
監察金克成母全氏墓碣銘

저자: 홍귀달 [洪貴達, 1438~1504]
본관 부계(缶溪). 자 겸선(兼善). 호 허백당(虛白堂) ·함허정(涵虛亭). 시호 문광(文匡). 1460년(세조 6) 강릉별시(江陵別試) 문과에 을과로 급제, 1464년 겸예문(兼藝文) ·예문관 봉교(奉敎), 1466년 세자시강원 설서 ·선전관이 되었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공을 세워 이조정랑에 오르고, 1469년(예종 1) 장령으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세조실록(世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직제학 ·동부승지를 지내고, 1479년(성종 10) 도승지로서 연산군의 생모 윤씨(尹氏)의 폐비(廢妃)에 반대하다가 투옥되었다. 1483년 왕명으로 《오례의주(五禮儀註)》를 개정했고, 충청도관찰사, 형조와 이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그 후 경주(慶州)부윤 ·대사성 ·중추부지사 겸 대제학 ·호조판서를 지내고,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좌참찬으로서 왕의 난정(亂政) 10여 조목을 들어 간(諫)하다가 좌천당하였다.

1500년에는 왕명으로 《속국조보감(續國朝寶鑑)》 《역대명감(歷代明鑑)》을 편찬하였고, 경기도관찰사가 되었으나, 1504년 손녀(彦國의 딸)를 궁중에 들이라는 왕명을 거역, 장형(杖刑)을 받고 경원(慶源)으로 귀양가던 도중 단천(端川)에서 승명관(承命官)에게 교살당하였다. 중종반정 후 복관되고 이조판서를 추증받았으며, 숙종 때 함창(咸昌)의 임호서원(臨湖書院)에 배향되었다.



* 鄭文翼公遺稿附錄
鄭文翼公事蹟附錄
○東閣雜記曰。令政府薦人。三公鄭光弼,申用漑,安?等。薦金克成文武兼備。可堪重任。成雲,李?才氣可用。?亦合邊寄。李荇有可用之才。不宜以一時被論。永廢不用。金湜,鄭浣,朴薰,朴英有才行。

저자: 정광필 [鄭光弼, 1462~1538]
본관 동래(東萊). 자 사훈(士勛). 호 수천(守天). 시호 문익(文翼)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등용되고, 부제학 ·이조참의를 역임하였으나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왕에게 극간(極諫)하여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부제학에 복직, 이조참판 ·예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1510년(중종 5) 우참찬(右參贊)으로 전라도도순찰사가 되어 삼포왜란(三浦倭亂)을 수습한 뒤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516년 영의정에 올랐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를 구하려다가 파직되고 1527년 다시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되었으나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나자 면직되었다. 1537년 총호사(總護使)로서 장경왕후(章敬王后)의 희릉(禧陵)을 잘못 쓰게 하였다는 김안로(金安老)의 무고로 김해(金海)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김안로의 사사(賜死)로 풀려났다. 이때 영의정 윤은보(尹殷輔), 좌의정 홍언필(洪彦弼) 등이 영의정에 추천했으나, 과거 영의정 때의 실정을 이유로 중종이 거절하였다.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죽었다. 중종의 묘정(廟庭)과 회덕(懷德)의 숭현서원(崇賢書院), 용궁(龍宮)의 완담향사(浣潭鄕社)에 배향되었다. 문집 《정문익공유고(鄭文翼公遺稿)》가 있다.



* 虛庵先生續集卷之三
?錄
師友錄
金克成字成之。光州人。孟權子。登文科。中宗朝爲安老所?被謫。安老敗後。入拜右相。號栗庵。諡忠貞

저자: 이우 [李?, 1469~1517]
본관 진보(眞寶). 자 명중(明仲). 호 송재(松齋).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검열(檢閱)이 되고 정언(正言)·이조좌랑·헌납 등을 지냈으며, 1506년 승지로 있다가 중종반정 때 공을 세워 분의정국(奮義靖國)공신에 책록되고,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다.

1514년(중종 9) 김은(金銀)의 상소로 앞서 반정 당시 윤장(尹璋)·조계형(曺繼衡) 등과 함께 입직승지로서 반정군에 가담하여 공을 세운 것처럼 가장한 사실이 드러나 녹권(錄卷)이 박탈되었다. 뒤에 안동부사가 되어 청근수령(請謹守令)으로 1계급이 특진되었으며, 시문에도 이름이 높았다. 문집에 《송재집(松齋集)》이 있다.


* 中宗實錄拔彙
右議政金克成啓曰。近來旱氣太甚。禾稼焦損。
安有如此迫切之事乎。陰陽和。然後風雨以時。
臣等俱以無狀。濫居重地。不能燮理。陰陽安得以和乎。
以此陰陽乖和。致有旱氣。皆臣等不職所致。請速遞臣等之職。
擇其人而置之。然後陰陽和而雨澤下矣

저자: 홍언필 [洪彦弼, 1476~1549]
본관 남양(南陽). 자 자미(子美). 호 묵재(默齋). 시호 문희(文僖).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이듬해 중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저작(著作) ·지평을 지냈다. 1519년 사가독서(賜暇讀書) 후 우승지(右承旨)가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몰려 투옥되었다가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변호로 풀려났고, 1526년 형조참판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대사헌을 여섯번 역임하고 각조의 판서를 거쳐 1535년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다가 김안로(金安老)의 모함으로 파직되었다.
2년 뒤 김안로가 실각하자 호조판서에 복관되고, 우의정에 올라 좌의정을 거쳐 1544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 해 인종이 즉위하자 유관(柳灌) 등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었다가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전임하고, 1545년(명종 즉위) 위사(衛社)공신에 책록되고 익성(益城)부원군에 봉해졌다. 1548년 좌의정 ·영의정에 재임되고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하고, 문집으로 《묵재집》이 있다. 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齋先生文集卷之 六
戊寅日記
御不時經筵。仍引見政府,兵曹及知邊事黃衡,高荊山,李長坤,尹希平,崔漢弘,金克成等議邊事。領相鄭光弼以衆議啓曰。住張哈不可輕擊生?。請待兵使招致敎後。答辭更議云云。高嶺僉使林千孫。防禦則可矣。無應變才。請遞。從之



* ?齋先生文集 卷之七
朝天錄
世宗嘉靖十八年 中宗大王三十四年 己亥?〔閏七月〕十七日。賜宴。禮曹判書李龜齡,參議蔡世英,都承旨申瑛,奏請使權?,冬至使任權。參宴。正郞朴世豪,佐郞安忠達,沈通源。二十二日。刑曹判書丁玉亨,參判鄭順朋,參議林鵬邀餞于慕華館。衛將徐壽,千令,李濟同參。二十三日。告行于領相尹殷輔,左相洪?弼。柳溥宅。右相金克成來見

저자: 권벌 [權?, 1478~1548]
본관 안동. 자 중허(仲虛). 호 충재(?齋) ·훤정(萱亭). 시호 충정(忠定).
1496(연산군 2)에 진사가 되고, 1507년(중종 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 ·사성(司成)을 거쳐 도승지가 되고, 1519년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어 삼척부사로 나가 있다가 이 해 겨울에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파직당했다. 1533년 밀양부사로 복직되었으며, 경상도관찰사 ·형조참판을 거쳐 한성부판윤을 지냈으며, 1539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춘추관지사(春秋館知事)로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을 겸하였다.
1545년(인종 1) 우찬성으로 의금부판사를 겸하였고, 이 해 7월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었다. 8월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올랐으나 정순붕(鄭順朋)의 반대로 삭훈(削勳)되고, 1547년(명종 2)에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된 죄로 구례(求禮)에 유배된 후, 삭주(朔州)에 이배(移配)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선조 초에 신원(伸寃)되고, 좌의정이 추증되었으며, 봉화(奉化)의 삼계서원(三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문집에 《충재집(?齋集)》이 있다.



* ?仰集卷之五
丁酉嘉靖十六年。 中宗三十二年 冬。安老權勢日盛。上特誅安老。無擇,沆幷賜死。告太廟五日而先生拜弘文館副應敎。○洪?弼,金克成相繼入相。慕齋亦起廢還朝。

저자: 송순 [宋純, 1493~1583]
본관 신평(新平). 자 수초(遂初). 호 면앙정(? ?仰亭) ·기촌(企村). 시호 숙정(肅定).
1519년(중종 14) 별시문과에 급제, 1547년(명종 2)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지냈다. 1550년 이조참판 때 죄인의 자제를 기용했다는 이기(李? ?) 일파의 탄핵으로 유배되었다. 구파의 사림(士林)으로 이황(李滉) 등 신진사류(士類)와 대립하였다. 1569년(선조 2) 대사헌 등을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가 치사(致仕)했다.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로 시조에 뛰어났다. 담양(潭陽)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문집에 《기촌집》 《면앙집》이 있고 작품에 《면앙정가(? ?仰亭歌)》가 있다.



* 艮齋先生文集卷之十二
艮齋先生年譜補遺
史臣曰。安老以此嫌鄭光弼,李荇,兪汝霖,金克成,曹繼商,金?,金萬鈞,崔演,李名珪,鄭惟善。皆誣以罪。而張順孫,黃士佑,成倫,柳世麟,蘇逢。擢用不多年間。皆至宰相之列。而南世健亦顯焉。 中宗實錄

저자: 최연 [崔演, 1503~1546]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자는 연지(演之), 호는 간재(艮齋)이다.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1519년(중종 14) 사마시를 거쳐 1525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이후 예문관검열이 되고, 이어 저작(著作)에 올랐다.1530년 송순(宋純)·송인수(宋麟壽)·주세붕(周世鵬)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설서·사서를 거쳐 이듬해 김안로(金安老)의 전횡(專橫)을 고변(告變)하고 홍문관수찬에 올랐다. 1545년(명종 즉위년) 도승지로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가 선조 때 삭직되기도 했다. 이듬해《중종실록》을 감수(監修)하였으며, 1548년 형조판서·홍문관제학이 되었다. 같은 해 사은사로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평양에서 병사하였다.시문에 능하여 국가에서 주관하는 교서·책문(策文)을 주로 담당하였고, 어제시(御製詩)에 항상 수석 또는 차석을 차지하여 왕의 총애를 받았다. 좌찬성 겸 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양(文襄)이다.저서에 원접사(遠接使) 소세양(蘇世讓)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중국 사신들과 화답(和答)한 시를 모은《후동차록(後東?錄)》과 시문집《간재집(艮齋集)》등이 있다. 묘는 강릉시 주문진읍(注文津邑)에 있다.


* 忍齋先生文集卷之三
有明朝鮮國通訓大夫司僕寺正尹君墓 碣銘幷序

尹氏出坡平 成化乙未十二月十三日。生公。公諱承柳。字重胤 - 中 略 -
生二子。長曰燮。尙成宗大王女靜淑翁主。爲鈴平尉。次曰燁。忠義衛。娶全州望族李謹行女。因鈴平貴。推恩三世。追贈僕正公爲參判。副正公爲參議。鈴平早歿無子女。燁生二男四女。男長曰之讓。忠義衛。次曰之?。生員。爲鈴平後。女長適修撰金祺。次適宗室廣川君壽祺。次適司僕僉正李?。次適參判韓?。之讓娶右議政金克成之女。生二女。長適及第李樑。次適生員崔希齡。之?娶參判南世雄之女。生一男曰儼。承文正字。

저자: 최현 [崔晛, 1563~1640]
본관 전주(全州). 자 계승(季昇). 호 인재(?齋). 시호 정간(定簡). 1588년(선조 21)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구국책을 올려 원릉참봉(元陵參奉)이 되었다. 1606년 증광별시(增廣別試) 생원과에 장원,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광해군 때 천도론(遷都論)이 거론되자 이를 반대, 그 계획을 중단시켰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는데, 1627년(인조 5) 이인거(李仁居)의 모반에 관련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왕명으로 석방되었다. 예조판서에 추증되고, 선산(善山) 송산서원(松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인재집(?齋集)》 《일선지(一善志)》 등이 있다.



* 牛溪先生續集卷之六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諡思肅公行狀?

獻納金克成曰。此雖臣子職分之事。無補於國家。而禍將滋蔓。諫疏何益。公答曰。見危授命。臣子之大義。今以諫諍爲己任。死不可辭也。克成反覆不可者再三。

저자: 성혼 [成渾, 1535~1598]
본관 창녕(昌寧). 자 호원(浩源). 호 우계(牛溪)·묵암(默庵). 시호 문간(文簡). 좌의정이 추증된 성수침(成守琛)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파평(坡平) 윤씨. 서울 순화방(順和坊)에서 태어났으며, 1539년 파산(坡山) 우계로 이사하면서 경기도 파주에서 자랐다.
17세에 신여량(申汝樑)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그해 진사·생원 양시에 합격하였으나 문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백인걸(白人傑)에게 《상서(尙書)》를 배웠으며, 당시 같은 고을에 살던 이이(李珥)와 도의지교를 맺었다. 선조 초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현감 등을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파산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동서분당기에는 이이·정철(鄭澈) 등 서인과 정치노선을 함께 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이조참판에 등용되었으며, 이때 북인 최영경(崔永慶)의 옥사 문제로 정인홍(鄭仁弘) 등 북인의 강렬한 비난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 중에는 세자의 부름으로 우참찬이 되었으며, 1594년 좌참찬으로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주화론을 주장하였다.
학문 경향은 이이와 1572년부터 6년간에 걸쳐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한 왕복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서신에서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비판하였다. 이이는 그의 학문을 평가하여 “의리상 분명한 것은 내가 훌륭하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외손인 윤선거(尹宣擧)는 그가 학문에 있어서 하나하나 실천하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학문은 이이와 함께 서인의 학문적 원류를 형성하였으며, 문인으로는 조헌(趙憲)·황신(黃愼)·이귀(李貴)·정엽(鄭曄) 등이 있다. 그의 학문은 이황과 이이의 학문을 절충했다는 평가가 있으며, 외손 윤선거, 사위 윤증(尹拯)에게 계승되면서 소론학파의 사상적 원류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기축옥사에 관련된 연유로 삭직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복관되었다. 좌의정에 추증, 16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파주 파산서원(坡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 《우계집》과 저서에 《주문지결(朱門旨訣)》 《위학지방(爲學之方)》 등이 있다.



* 栗谷先生全書卷之十七
大司憲成公神道碑銘?
時燕山刻刑。濫及非辜。一日將戮沈順門。適賜?臣宴闕庭。公顧四座曰。諫官可無言乎。兩司皆縮頸。獨獻納金克成, 正言李世應奮辭應公。公笑曰。事若不測。吾三人當之。諸公色?不敢違。遂抗章論救。雖不見省。士議偉之。

저자: 이이 [李珥, 1536~1584]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 시호 문성(文成), 강원도 강릉 출생이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원수(元秀)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고, 이 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殿試)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동안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년(선조 9) 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이후 한동안 관직에 부임하지 않고 본가가 있는 파주의 율곡과 처가가 있는 해주의 석담(石潭)을 오가며 교육과 교화 사업에 종사하였는데, 그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이조·형조·병조 판서 등 전보다 한층 비중 있는 직책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이 무렵 《기자실기(箕子實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 浮査先生文集卷之一
詩○七言絶句
敬次灌圃魚先生雙溪寺八詠樓韻幷序
丁巳冬 - - - 其移書之以與我。我欲刻之板。懸於雙溪寺邀鶴樓。使後人知八詠樓之所由作也。余於是。披而閱之。乃魚先生雙溪寺八詠樓所題記及詩。和之者有金克成,黃?,閔壽千,黃汝獻,朴世煦諸賢之作。亦皆先生之手自書者也。噫。先生。余所景慕。而與余有連派之分。

저자: 성여신 [成汝信, 1546~1632]
조선시대 문인. 본관 창녕(昌寧). 자 공실(公實). 호 부사야로(浮査野老) ·부사. 조식(曺植)의 문인. 일찍부터 문명(文名)을 떨치고 1609년(광해군 1) 64세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진주(晉州) 임천서원(臨川書院)과 창녕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에 《부사문집(浮査文集)》이 있다.



* 知退堂集卷之九
東閣雜記坤○本朝璿源寶錄 中宗
正德己卯四月 - - - 傳旨于政府。令薦人才。三公鄭光弼,申用漑,安?等薦金克成。文武兼備。可堪重任。



* 知退堂集卷之十一
東閣雜記坤○本朝璿源寶錄 明宗
中廟改玉以後三公。姑以所知記之。柳洵,金壽童二人。燕山時已爲相。朴元宗,柳順汀,成希顔,宋?,鄭光弼,申用漑,金應箕,安?,金銓,南袞,李惟淸,權鈞,沈貞,李荇,張順孫,韓效元,金謹思,金安老,尹殷輔,柳溥,洪彦弼,金克成,尹仁鏡,柳灌,成世昌,李?,鄭順朋,林百齡,黃憲,沈連源,尙震,尹漑,安玹,尹元衡,李浚慶,沈通源,李蓂,權?,閔箕,洪暹,李鐸,朴淳,盧守愼,姜士尙,金貴榮,鄭芝衍,鄭惟吉,柳典,李山海,鄭彦信,鄭澈,沈守慶,柳成龍,李陽元,崔興源,尹斗壽,兪泓,金應南,鄭琢,李元翼,李德馨,李恒福,李憲國,尹承勳,金命元,柳永慶,奇自獻,沈喜壽,許頊,韓應寅。世傳林百齡。以府院君赴京而死。未及拜相云矣

저자: 이정형 [李廷馨, 1549~1607]
본관 경주(慶州). 자 덕훈(德薰). 호 지퇴당(知退堂) ·동각(東閣). 1567년(명종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68년(선조 1) 별시문과에 급제, 형조정랑(刑曹正郞)을 거쳐 1584년 교리(校理)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좌승지(左承旨)로서 왕을 호종, 개성(開城)에서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에 특진되었다. 개성이 함락된 후 형 이정암(李廷? )과 황해도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을 격파,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593년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평양탈환전에 참가하였고, 1594년 판결사(判決事)로서 고급사(告急使)가 되어 요동(遼東)에 다녀왔다. 1596년 4도도체찰부사(四道都體察副使)가 되고 후에 이조참판 ·대사성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1602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후에 북인에 의해 남인 이원익(李元翼) ·이항복(李恒福)이 물러나자 병을 이유로 사직했다가 1606년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재직중에 병사하였다. 성리학을 연구하여 성력(星曆) ·복서(卜筮) ·단수(斷數)까지 통달하였다. 춘천(春川)의 문암서원(文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동각잡기(東閣雜記)》 《지퇴당문집(知退堂文集)》 《수춘잡기(壽春雜記)》 등이 있다.



* 宋子大全卷一百六十四
林將軍神道碑?(*林蘭秀)
四男長曰?。次曰穆。次曰敍。次曰興。妾女子元萬。其文凡三百七十六字。又據譜牒。?官水使。穆襄陽都護府使。後不仕而構亭公州江上。名曰獨樂。敍忠毅校尉左軍司直。興威毅將軍。穆三男。蓀內侍別監。萱進士。芷萬戶。敍三男。孟剛,仲剛,季剛。仲剛萬戶。興一男孟仁萬戶。蓀男重。掌樂正。其配讓寧大君?之女。芷二男。謹監察。俊主簿。仲剛五男。亨,貞,義縣監。智,致兵使。女壻右議政金克誠。孟仁二男。水鐵主簿。石鐵司直。自將軍至今十餘世。而內外子孫多不能盡錄。

저자: 송시열 [宋時烈, 1607~1689]
본관 은진(恩津).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 문정(文正). 아명 성뢰(聖賚). 1633년(인조 1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掌令)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1651년(효종 2) 그가 찬술한 《장릉지문(長陵誌文)》에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고 김자점이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의 압력을 받아 사직하고 또 낙향, 충주목사(忠州牧師)·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후진 양성에 전심하였다.
1658년(효종 9)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그 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기년설(朞年說: 만 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 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60년(현종 1) 우찬성에 올랐을 때, 앞서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규탄을 받고 낙향하였고, 1668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이듬해 덕원(德源)으로 유배, 그 뒤 여러 곳으로 유배장소가 옮겨졌다.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胃)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 그를 영수로 한 노장파의 노론(老論)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그 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주자학(朱子學)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李滉)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禮論)에도 밝았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政敵)을 많이 가졌으나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묘(文廟)·효종묘(孝宗廟)를 비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華陽書院), 여주의 대로사(大老祠), 수원의 매곡서원(梅谷書院)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송자대전(宋子大全)》《우암집(尤庵集)》《송서습유(宋書拾遺)》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정서분류(程書分類)》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심경석의(心經釋義)》《사계선생행장(沙溪先生行狀)》 등이 있다.



* 陶谷集卷之二十八
雜著
陶峽叢說
中宗朝。朴元宗,柳順汀,成希顔,宋?,鄭光弼,金應箕,申用漑,安?,金詮,南?,李惟淸,權?,沈貞,李荇,張順孫,韓效元,金謹思,金安老,尹殷輔,柳溥,洪彦弼,金克成,尹仁 鏡。

저자: 이의현 [李宜顯, 1669~1745]
본관 용인(龍仁). 자 덕재(德哉). 호 도곡(陶谷). 시호 문간(文簡). 1694년(숙종 20)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 ·정언(正言) ·교리(校理) ·부응교(副應敎) 등을 거쳐 1708년(숙종 34) 승지(承旨)가 되었다. 1716년 예조참판이 되고 1720년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형조 ·예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에 연루되어 운산(雲山)에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풀려나와 1727년(영조 3) 우의정에 올랐으나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쫓겨났다가 다음 해 박필몽(朴弼夢) 등의 반란(叛亂)이 있자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가 되어 난을 평정하고, 1735년 영의정이 되었다. 청백리로도 알려졌지만 글도 잘해 《경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고, 글씨도 잘 써 여러 비문에 필적을 남겼다. 문집에 《도곡집(陶谷集)》이 있다.


* ?靑莊館全書卷之二十六
紀年兒覽[下]
【修】本朝世年紀 附故實。功臣。配享。相臣。
相臣: 朴元宗。武科。丙寅。拜右議政。至領議政。 柳順汀。文魁。丁卯。拜右議政。至領議政。 成希顔。文科。己巳。拜右議政。至領議政。 宋?。文科。壬申。拜右議政。至領議政。 鄭光弼。文科。癸酉。拜右議政。至領議政。 金應箕。文科。癸酉。拜右議政。至左議政。 申用漑。文科。丙子。拜右議政。至左議政。○叔舟孫。 安?。文科。戊寅。拜右議政。至左議政。辛巳被禍。金銓。文魁。己卯。拜右議政。至領議政。 南?。文科。己卯。拜右議政。至左議政。後追奪。 李惟淸。文科。己卯。拜右議政。至左議政。 權鈞。文科。癸未。拜右議政。 沈貞。文科。丁亥。拜右議政。至左議政。辛卯。罪死。 李沆。文科。丁亥。拜右議政。改正。 李荇。文科。丁亥。拜右議政。至左議政。甲午。謫卒。 張順孫。文科。庚寅。拜右議政。至領議政。 韓效元。文科。辛卯。拜右議政。至領議政。 金謹思。文科。癸巳。拜右議政。至領議政。丁酉。謫卒。金安老。文魁。甲午。拜右議政。至左議政。丁酉。罪死。○詮侄。 尹殷輔。文科乙未。拜右議政。至領議政。 柳溥。文科。丁酉。拜右議政。至左議政。○順汀侄。 洪彦弼。文科。丁酉。拜右議政。至領議政。 金克成。文科。丁酉。拜右議政。 尹仁鏡。文科。庚子。拜右議政。至領議政。

저자: 이덕무 [李德懋, 1741~1793]
본관 전주(全州). 자 무관(懋官). 호 형암(炯庵) ·아정(雅亭) ·청장관(靑莊館). 정종(定宗) 별자(別子) 무림군(茂林君)의 후손. 통덕랑(通德郞) 성호(聖浩)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얼(庶孼) 출신으로 빈한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박람강기(博覽强記)하고 시문에 능하여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성대중(成大中) 등과 사귀고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냈으며 이것이 청나라에까지 전해져서 이른바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1778년(정조 2) 중국 여행 기회를 얻어 청나라의 문사들과 교류하고 돌아왔으며, 1779년에 정조(正祖)가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여기에 서얼 출신의 우수한 학자들을 검서관(檢書官)으로 등용할 때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徐理修) 등과 함께 수위(首位)로 뽑혔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규장각에서 《국조보감(國朝寶鑑)》 《대전통편(大典通編)》 《무예도보(武藝圖譜)》 《규장전운(奎章全韻)》 《송사전(宋史筌)》 등 여러 서적의 편찬 교감에 참여하였으며, 많은 시편(詩篇)도 남겼다. 서울 지도인 <성시전도(城市全圖)>를 보고 읊은 백운시(百韻詩)가 정조로부터 ‘아(雅)’라는 평가를 받아 호를 아정(雅亭)이라 새로이 칭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검서를 겸한 채 외직에도 나가서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등을 거쳤으며 1791년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가 되었다가 《홍문관지(弘文館志)》를 교감한 공로로 적성현감(積城縣監)에 제수되었다.
1793년 병들어 돌아가자, 3년 뒤 그의 재주를 아끼던 정조가 내탕전(內帑錢) 오백 냥을 하사하여 문집 《아정유고(雅亭遺稿)》 8권 4책을 간행하게 하였다. 문자학(文字學)인 소학(小學), 박물학(博物學)인 명물(名物)에 정통하고, 전장(典章) ·풍토(風土) ·금석(金石) ·서화(書畵)에 두루 통달하여, 박학(博學)적 학풍으로 유명하였다.
따라서 북학을 고창하지는 않았으나 명(明)과 청(淸)나라의 학문을 깊이 이해하고 고염무(顧炎武) 이래 청조 고증학의 성과를 수용하여 실질적으로는 북학을 함으로써 후배들의 청조 고증학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서로는 이만운(李萬運)의 책을 보완한 역사서 《기년아람(紀年兒覽)》, 사(士)의 윤리와 행실을 밝힌 《사소절(士小節)》, 고금의 시화(詩話)를 수록한 《청비록(淸脾錄)》, 명나라 유민(遺民)의 인물지인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 등 십여 종이 있고, 이들은 《아정유고》 등 문집과 함께 아들 광규(光葵)에 의해 망라되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71권 33책으로 편찬되었
다.

댓글목록

김영모님의 댓글

김영모 작성일

종중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시는 성봉일가님께 뜨거운 박수를 보냅니다. 아울러 선조들에 대한 소중한 자료를 매번 올려주시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조상의 얼을 하나 둘 알게되어 가슴 뿌듯함을 느낍니다. 이번 자료 또한 충정공의 이름이 올라있는 문집에서 발췌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다만 문집의 저자들에 대한 설명이 상대적으로 길고 문집 속에 들어간 충정공의 내용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아쉬움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성봉님의 댓글

성봉 작성일

원문에서 충정공의 휘자가 나오는 부분만 발췌했으니
 전문을 원한다면 E-mail 로 보내겠습니다.

저자에 관한 설명이 상세한 점은 이렇게 현달한 분들이
충정공을 언급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본인 E-mail : bukakin@naver.com

김영모님의 댓글

김영모 작성일

잘 알겠습니다. 가능하다면 어려우시더라도 전문을 보내주시면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다시한번 성봉 일가님의 종중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성봉님의 댓글

성봉 작성일

일가님이 원하는  문집명을 위에 있는 E-mail 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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