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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랑공 휘 우성(佑成)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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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08-11-14 15:19 조회1,8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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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랑공 휘 우성(佑成)에 관하여

김우성(金佑成)의 字는 길응(吉應)이니 1564년에 출생하여 진사시에 합격하고 선조조에
판관을 지냈으며 광해조에 주부와 공조좌랑을 지낸 후. 1618년 9월 26일에 졸하였다.
부인은 창녕조씨(昌寧曺氏)요 묘는 영산 대치(榮山 大峙)에 있다..

부는 첨지중추부사 휘 홍(洪)이고 모는 완산이씨며 조는 소암공 휘 정언(廷彦)이고 증조는 주은공 휘 식(軾)이고 고조는 주부공 휘 치섬(致?)이다. 형은 금서공 휘 경성(慶成)과 금계공 휘 준성(俊成)이고 弟는 취헌공 휘 익성(益成)이다.
시서유고(市西遺稿)를 보면 조카인 시서공 휘 선(旋)과는 정치노선이 달랐던 것으로 여긴다.

김우성에 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증초본 47건과 정초본 17건 및 효종(孝宗 1년) 1건이 있으며 문집에는 송천유집(松川遺集), 송강집(松江集),시서유고(市西遺稿), 인재집(認齋集), 월사집(月沙集), 은봉전서(隱峯全書),기암집(田+奇庵集), 송자대전 (宋子大全), 문공집(文公集), 수곡집(睡谷集), 장암집(丈菴集), 과암집(果菴集), 성담집(性潭集),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기축록(己丑錄), 혼정편록(混定編錄),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등에 나오며 近刊으로는 金倉圭著 <麗鮮誌文學論考> 17世紀 歌辭詩, 時調 “白松潭 硏究” 에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휘 우성은 진사시에 급제하여 선조조(宣祖朝)에 판관을 제수받았으며 광해조 때 사도주부(司導主簿)로 있다가 광해(光海) 10년인 1618년 음력 8월 5일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제수받았다.

시중공파보에 김우성을 형조좌랑이라 기록하고 있는바 이는 바르지 못하다.
또 보첩에는 졸년기록이 없으나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1618년 음력 9월 26일에
장형(杖刑)으로 졸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광해 131권, 10년 8월 5일(신유) 9번째기사
박승종·박홍구·이상의·이이첨·이필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승종(朴承宗) 을 좌의정으로, 박홍구(朴弘耉) 를 우의정으로, 이상의(李尙毅) 를 이사(貳師)로, 이이첨(李爾瞻) 을 판의금부사로, 이필영(李必榮) 을 좌찬성으로, 김신국(金藎國) 을 우참찬으로, 이충(李沖) 을 좌부빈객으로, 유희발(柳希發) 을 이조 참판으로, 이대엽(李大燁) 을 이조 참의로, 이홍주(李弘胄) 를 형조 참의로, 김치(金緻) 를 병조 참의로, 정규(鄭逵) 를 참지로, 임길후(任吉後) 를 광주 목사로【 길후 는 왕이 총애하는 궁인의 오라비이다. 말단 음직에서 발탁되어 관직이 유수(留守)에까지 이르렀다.】, 안응로(安應魯) 를 대교로, 이필달(李必達) 을 검열로, 한정국(韓正國) 을 겸설서로, 유희안(柳希安) 을 사복 첨정으로, 박항길(朴恒吉) 을 형조 정랑으로, 권진기(權盡己) 를 고산 찰방으로, 김우성(金佑成) 을 공조 좌랑으로【 김우성 은 거상 중에 행실이 없었고 친족들에게 행패를 부려 호남 사람들은 그를 뱀이나 전갈처럼 보았다. 일찍이 나덕윤(羅德潤) 등과 함께 상소하여 정철 을 죄줄 것을 청하면서 이이(李珥) · 성혼(成渾) 까지 언급하였는데 이 때문에 조정의 후한 대접을 받았다. 목장흠(睦長欽) 이 나주 목사가 되었을 때 직접 그의 행실을 알고는 돌아와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 우성 은 기록할 만한 악행은 무수히 많으나 일컬을 만한 선행은 한 가지도 없다.” 하니, 그 친구가 말하기를, “그렇기는 하나 우성 이 능히 성혼 을 공격하였으니 우리 편에서 보자면 어찌 현인이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때에 이이첨 과 허균 에게 아부하여 대론(大論)을 힘껏 주장하였으므로 발탁 등용된 것이다.】삼았다.
【정족산사고본】31책 131권 3장 A면
【영인본】33책 140면


광해 132권, 10년 9월 26일(신해) 8번째기사
정국하여 김우성과 봉학을 형신하였으나 불복하고 죽다

정국하였다. 김우성 을 두 차례 형신하고, 봉학 을 세 차례 형신하였는데, 모두 불복하고 죽었다.
【정족산사고본】32책 132권 26장 B면
【영인본】33책 168면
○庭鞫。 金佑成 刑訊二次, 奉鶴 刑訊三次, 竝不服而斃。
【태백산사고본】47책 47권 113장 A면
【영인본】 29책 680면


인종반정 직후 등용되었던 남인 최현(崔晛)은 광해군 말년 당시 삼사(三司)와 풍헌(風憲),
전선(銓選) 등을 맡았던 관인들은 전부 이이첨의 심복이었음을 지적한 뒤, 그와 연결된 대북파
관인들을 다음과 같이 5가지 부류로 분류한 바 있다. 1) '요직에 있으면서 이이첨과 함께 정치적
모의를 주도한 부류〔盤據樞要而主其謀者〕'→ 韓纘男, 朴鼎吉, 鄭造, 尹 , 李偉卿, 李昌俊
2) '이이첨과 안팎으로 호응하면서 정치적 모의를 실행에 옮겼던 부류〔表裏相扇而濟其謀者〕'.
→ 許筠, 金愷, 元悰, 李 , 白士珩, 黃德溥, 朴宗胄
3) '인사권을 장악하면서 당파를 부식하는 데 힘쓴 부류〔遞掌銓曺而務植黨者〕'→ 鄭遵, 韓玉,
李大燁·益燁, 李挺元, 吳汝穩
4) '이이첨의 앞잡이가 되어 주구처럼 행동했던 부류〔其鷹犬而主搏筮者〕'→ 徐國禎, 洪堯儉,
黃中允, 吳益煥, 安應老, 蔡謙吉, 姜遂, 韓涑, 李 , 鄭潔
5) '외곽에 머물면서 상소 등을 통해 이이첨을 지원했던 부류〔群伏類聚而陳章疏者〕
'→ 河仁俊, 金佑成, 黃廷弼, 呂後望, 刑孝甲, 郭有道, 李坪, 閔藻, 鄭淇, 孫佑, 李藏, 李慕위에서 최현이
대북파로 거론한 인물들은 실제 거의 예외 없이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등의 중형을 받았는데
김우성은 인조반정이 있기 5년 전인 1618년 9월 26일에 허균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刑杖을
맞고 졸하엿다


허균(許筠)의 역모와 관련된 인물편에 휘 우성(佑成)이 나오는데 아래와 같다..

강호여(康?如), 김경(金璥), 김내용(金乃鎔), 김대하(金大河), 김상립(金尙立), 김상하(金尙夏),
김용강(金用剛), 김윤휘(金胤輝), 김정량(金廷亮), 김홍무(金弘武), 김홍원(金弘愿), 김효남(金孝男), 문홍경(文弘慶), 박린(朴麟), 박몽준(朴夢俊), 박시준(朴時俊), 박충남, 박홍익(朴弘益), 배득길(裵得吉), 백대진(白大璡), 변열(邊說), 설경인(薛景仁), 설구인(薛求仁), 송효남(宋孝男), 신보(申溥), 신천룡(愼天龍), 안억주(安億柱), 양덕윤(梁德潤), 양홍(梁泓), 오대인(吳大仁), 오언경(吳彦卿), 우경방, 우민(禹民), 윤유겸(尹惟謙), 이강, 이거(李渠), 이건원(李乾元), 이구(李?), 이국광(李國光), 이국량(李國亮), 이국헌(李國獻), 이송수(李松壽), 이승길(李承吉), 이훤(李萱), 이희직(李希直), 임경후(任慶後), 임국신(任國信), 임급(任扱), 임덕후(任德後), 임원(任援), 장응기(張應麒), 장의범(張懿範), 장호녕(張好寧), 전응민(田應民), 정유준(丁有浚), 정유후(丁有後), 정주한(鄭周翰), 정지문(鄭之問), 정흔(鄭昕), 최광필(崔光弼), 최상질(崔尙質), 하인준(河仁浚), 한보길(韓輔吉), 한의형(韓義亨), 한천정(韓天挺), 홍연기(洪衍箕), 홍인백(洪仁伯), 황정필(黃廷弼).
유생 서의중(徐義中), 이해(李垓), 참봉 양홍(梁泓).
상민: 김귀형(金貴亨), 김업량(金業良), 김은국(金銀國), 차극룡(車克龍).
천민: 허균의 종 돌동[石乙同], 종남(終男), 돌이.
기타: 현응민의 처 순가시(順加屎), 우경방의 처 무옥(戊玉), 등등.
* 차극룡(車克龍): 허균의 심복으로서 경운궁의 흉격에 참여하였다는 혐의.
* 박충남: 서리로서, 허균이 효수된 뒤에 그의 머리를 가져가려고 했고, 수직 군사를 마구 때렸다는 혐의.
* 송효남: 허균의 무리이고, 허균이 참서(懺書)를 가감하고 효남은 그 글을 썼다는 혐의를 받음.
* 전응민(田應民): 서리(書吏)로서, 허균의 심복이 되어 김업량(金業良)과 더불어 재산을 풀어 뇌물을 썼다는 혐의.
* 박홍익(朴弘益): 이건원(李乾元)을 잡아들이라는 명이 내렸는데도 자기 집에 숨겨 두고 도망시킬 계책을 세운 혐의.
* 김은국(金銀國)?김귀형(金貴亨): 수철장(水鐵匠). 우경방의 군목(軍目)에 이름이 들어 있음.
* 박린(朴麟): 별시위(別侍衛)로서, 우경방의 군목(軍目)에 이름이 들어 있었음.
* 김용강(金用剛): 김상립(金尙立) 등과 더불어 상소하여 하인준(河仁俊)을 구원함.
* 이해(李垓)와 서의중(徐義中): 호남의 유생으로 허균의 심복이었다. 대론(大論)에 가탁해서 무뢰배와 산승(山僧)들과 결탁하였는데 그 자취가 수상하다는 소문이 전파되어 있었다.
* 장의범(張懿範): 김상립의 상소에 참여하여 역적을 구원했다.
* 백대진(白大璡): 선전관으러서, 허균이 원정(元情: 조서)하던 날, 허균이 죄가 없다고 외쳐대었음. 파직됨. (9월 18일)
* 이국량, 종남, 이국헌은 모두 고문 받다 죽었다. (9월 21일)
특히 김개, 원종(元悰), 김우성(金佑成)의 이름이 거론된다. 김개는 허균이 하옥될 때 형구를 풀어주었는데 허균과의 관계로부터 그 이상의 죄가 있다고 대신들이 주장했다.
그리고 김우성은 역모를 주도한 인물 중 하나로 지목되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들에 대한 처리는 미루어지다가 김개와 김우성은 고문으로 매를 맞다가 죽었다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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