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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현당(三賢堂)과 삼현(三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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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암 작성일08-10-19 10:53 조회1,224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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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이글은 처가인 나주정씨 대종회발전연구위원 호남종회 부회장 정우걸님의 글입니다
성봉일가님의 의견을 듣고싶습니다

설재 정가신 선생의 행장(行狀)중에 당시의 명유 문숙공 김주정과 문현공 윤보와 도의로 교유하여 주야로 한곳에 있었으며, 조정에서 퇴궐한 뒤에는 성인의 경서와 현인의 책을 강론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 집을 이름하여 삼현당이라 하였다(當時 名儒 金文肅公 周鼎, 尹文顯公 珤 日夜同處 朝退之暇 講論聖賢 時人 名其堂曰 三賢堂)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김주정 선생과 윤보 선생의 행장 중에도 똑같은 기록이 있어 평소에 정가신 선생과 도의로 교유하신 다른 두 분은 어떠한 분들이며 어떻게 교유하였을까 궁금하게 생각하여 두 분의 후손들을 찾아가 종보(宗譜)와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등을 열람 해보았으나 모두 관직(官職) 활동기록이 연대(年代)가 불분명하여 삼현의 교유(交遊)관계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연대가 정확하게 기록 편찬되어 고려정사(正史)로 인정받고 있는 정인지(鄭麟趾)편찬 고려사(高麗史)와 김종서(金宗瑞)편찬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문헌(文獻)으로 연구하기로 하였다.

다만, 삼현의 출생지 출생년도 급제년도 최초의 관직년도가 동 문헌에 나타나지 않아 종보와 고려사 열전의 기록을 수록하였으며 (부록 2. 삼현의 관직활동 상황)은 독자가 편리하게 비교하면서 읽을 수 있고 특히 활동 연대를 한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도표로 작성했으며, 내용을 오손되지 않도록 원문(原文)을 그대로 번역하여 기록하였다.
본 연구는 정우걸 발전연구위원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한문(漢文)의 번역은 성암 정길회(省菴 鄭吉會)연구위원장께서 도움을 주셨으며 어려운 용어는 (부록 3. 용어해석)에 일일이 번호를 붙여 설명하였다.

1) 삼현에 대한 소고(小考)

가. 문정공 정가신과 문숙공 김주정과의 관계

문숙공 김주정 선생의 출생지는 상고 할 수 없으나 관향(貫鄕)이 광주(光州:光山)이므로 문정공과는 동향(同鄕)인이라고 볼 수 있으며, 연령의 차이도 문정공께서 5세 수상(手上)이므로 옛날 개념은 친구사이로 볼 수 있고, 한 조정에서 20여년을 근무하면서 왕의 측근에서 좌승지 우승지로 밀직사 (密直司 : 왕명출납)에서 재상(宰相)으로 함께 근무하였으며, 김주정 선생의 건의에 의하여 새로 설치한 필도지(必都赤)로 함께 있으면서 재상들을 제처 놓고 국가 중요 시책, 현안 문제 등을 심의하였으며, 당시 수상(首相) 김방경(金方慶)이 무고로 귀양갔을 때에도 두 분이 신원(伸寃)운동을 같이 해 김방경을 귀양에서 풀고 중찬으로 다시 임명케 한 것으로 보아 두분의 사이가 아주 가까웠으며 학문(學問)에 있어서도 문정공께서는 첨의부의 정당문학 밀직사의 밀직학사 한림학사등을 지내면서 당시 국가 최고 문장가로 외교문서, 왕의 조서 등을 도맡아 작성하였고,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원나라와 주변국에 까지 문명(文名)을 떨쳤던 대유학자(大儒學者)였으며, 문숙공께서도 문과로 장원급제하여 문한학사(文翰學士 : 조선의 예문관대제학)를 지낸 당시 최고 학문과 덕망을 갖춘 대학자였으므로 두 분은 학문적으로도 이상(理想)이 같아 도의교(道義交)를 하였을 것으로 본다.

나. 문정공 정가신과 문현공 윤보와의 관계

문현공 윤보 선생의 탄생지를 상고(上考)할 수는 없으나 관향(貫鄕)이 경기도 파평(坡平 : 지금의 파주)임으로 두 분 사이는 동향인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연령의 차이는 문현공의 출생년도를 알 수가 없어 정확하지는 않으나 문정공께서 타계하신지 꼭 31년 되는 해에 문현공께서 타계하였으니 추리(推理)는 가능하다.

고려사절요에 충숙왕8년(1321년) 10월에 윤보가 수첨의찬성사를 치사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문장을 다시 해석하면[윤보가 수첨의 찬성사직을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다]가 된다. 왜냐하면 치사(致仕)란 용어는 부록 3. 용어해석 42번과 같이 나이가 많이 먹게 되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대개 70세가 되면 치사하게 된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다시 첨의 정승을 지내다가 8년 후 충숙왕 16년(1329년)에 첨의정승치사로 타계하였으니 이때 춘추가 78세였고 이때에 문정공께서는(1329년) 춘추, 105세가 되니(105세-78세=27세) 문정공께서 27세 수상(手上)으로 추리된다. 그러므로 두 분 사이는 친구가 될 수 없고 사제(師弟)지간이 아닌가 생각된다.

문정공 초기 18년간의 관직기록이 없어 명확하지는 않으나 이 기간에 국자감(성균관 지금 대학)의 교수로 근무했을 것으로 보며 문현공 역시 틀림없이 국자감의 학생이었을 것이므로 사제지간이었을 것이다. 윤보 선생은 사기(史記)에 전혀 등장을 않다가 문정공께서 첨의중찬판전리사(이조상서로 재신이 겸하고 백관의 인사권자)가 되면서 47세의 윤보 선생이 재상의 지위인 밀직학사, 홍문관학사 의조상서(예조판서)로 일약 등장한 것을 보면 삼현당의 도의교와 무관한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문정공께서 타계하신 뒤로 성균관대사성 수문전학사등 만인이 우러러 보는 대제학의 지위에 있다가 수상이 되고 영평군(鈴平君)의 군호를 받았으며, 당시 최고 대문장가요 정치가였다.

세계 최대제국 원나라와 동방에 문명을 떨치고 5~6시간을 몽고어로 대화하면서 원세조(元世祖)를 감복(感服) 시킨 대 외교가이시며 정치가이신 문정공께서 이렇게 장래가 촉망되는 제자를 알아보시고, 사랑하는 제자와 학문을 문답하고 강론(講論)했을 것이다.
다. 문숙공 김주정과 문현공 윤보와의 관계
두 분 사이는 문숙공이 22세 수상이 되고 조정에서 같이 근무한 기록이 전혀 없어 관계(官界)의 인연은 알 수가 없고, 장래가 촉망되는 양반가의 후배이고 문정공의 사랑하는 제자이기 때문에 교유한 것으로 사료된다.

2) 삼현당(三賢堂)의 위치에 대한 소고

삼현당의 위치는 과연 지금 어디일까? 쌍계정인가 아니면 개성 부근인가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명백한 기록이 없어 쌍계정설과 개성설이 양분되고 있다. 따라서 이 자료는 다만, 연구결과일 뿐이므로 반론이 있더라도 양해 해 주시기 바란다.

설재선생께서 20세 이전에 고승(高僧) 천기(天琪)를 따라 개성에 가셔서 대부소경 안홍우(大府少卿安弘祐)댁의 사위가 되어 15년(급제이전)이상 국자감 등에서 학문을 닦고(고려사 열전참조) 32세에 문과 급제하신 후 내,외직을 두루 거쳐 55세에 비서윤과 필도지가 되었으며, 57세에 우승지가 되고, 61세에 재상(宰相)이 되었고, 요직을 두루 거쳐 세자와 같이 원나라 북경에 가서 5년여를 체류하고 돌아와 73세 수상(首相)이 되고, 75세에 수상 재직시 개성에서 타계하셨는데, 천리길 고향 금안동(金鞍洞)을 공무 중에 언제 다니시며 한가히 학문을 강론하셨겠는가 그리고 모두 공직에 근무하고 있던 삼현들께서 어떻게 함께 쌍계정(雙溪亭)을 오실수가 있으며 그 불편한 일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쌍계정이 설재선생의 정자는 될 수 있다. 어느 한적한 틈에 벼슬을 그만 두고 귀향할 때를 생각하여 미리 건축해 둘 필요는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쌍계정은 일반적 의미의 설재 정자일 뿐이고 爲道義交(위도의교) 日夜同處(일야동처) 朝退之暇(조퇴지가) 講論聖賢(강론성현) 時人(시인) 名其堂曰(명기당왈) 三賢堂(삼현당)이라는 이 종보의 원문(原文)은 당시 삼현당을 설명한 글인데 설명대로라면 삼현당은 삼현들께서 근무하고 조정에서 가까워야만 원문의 뜻과 부합된다.

그래서 쌍계정은 삼현이 주야로 만날 수가 없고 퇴근 후에 성현을 강론할 수 없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말하는 삼현당은 분명코 아니다. 개성(開城)에 있었다면 퇴근 후 또는 여가 중에 많은 제자 후배 동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학문의 전당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삼현당시(三賢當詩)는 대유학자(大儒學者)로 문묘(文廟)에 배향된 문성공 안향(文成公 安珦)선생이 “삼현당”이라 시제(詩題)를 내고 그 제목에 따라 복야 백원항(僕射 白元恒)선생이 지은 시인데 이분들과 삼현과는 어떠한 관계(關係)인가 하고 조사를 해보니 5인(五人) 모두가 고려 원종(元宗)대로부터 충열왕(忠烈王)대에서 20여년 이상을 조정(朝庭)에서 같이 군무한 분들로 모두 유학사상(儒學思想)을 정치이념(政治理念)으로 한 분들이었다. 그러므로 삼현당을 자주 출입하면서 동시(同詩)가 저작(著作)되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그렇게 보면 삼현당의 위치는 개성 부근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현당시 칠언절구중(七言絶句中) 맨 끝 구절에 조퇴장개만권당(朝退長開萬卷堂 : 퇴근 후에 만권당을 오래도록 열었네)이라 하였으니 삼현당은 도의교를 위하여 학문을 강토(講討)하고 정사(政事)만을 논하는 곳이 아니라 지금의 도서관(圖書館)역할도 한 것으로 사료된다.
다만, 확실한 기록이 없는 것을 아쉬워 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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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신(鄭可臣)

?∼1298(충렬왕 24). 고려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초명은 흥(興). 자는 헌지(獻之). 향공진사(鄕貢進士) 송수(松壽)의 아들이다.

어려서 승려 천기(天琪)를 따라 서울(개경)에 왔으나 의지할 곳이 없다가 태부소경(太府少卿) 안홍우(安弘祐)의 데릴사위가 되었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요직을 여러번 거친 뒤 1277년(충렬왕 3)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에 임명되었다.

1280년 첨의중찬(僉議中贊) 김방경(金方慶)이 퇴직하기를 청하자 승지로서 왕명을 받아 이를 물리쳤다.

1290년 세자가 원나라에 갈 때 그 스승으로 민지(閔漬)와 함께 수행하였다.

1291년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성절(聖節)을 축하하였으며, 첨의찬성사 세자이사(僉議贊成事世子貳師)에 임명되었다.

1294년에는 원나라의 성종(成宗)이 한림학사 살자만(撒刺蠻)으로 하여금 고려가 귀부한 연월(年月)을 물어오자 글로 답하였다.

1295년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진사를 취하고, 강훤(姜萱) 등 27명을 급제시켰다.

1296년에 왕이 상화연(賞花宴)을 향각(香閣)에서 베풀자 축하하는 시를 올렸는데, 왕은 도첨의낭사(都僉議郎舍)와 금내6관(禁內六官) 및 학관(學官)에게 명하여 상화내연시(賞花內宴詩)를 써서 화답하게 하였다.

1297년에 첨의중찬 판전리사사(僉議中贊判典理司事)·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었다.

1298년에 왕에게 글을 올려 첨의중찬으로 퇴관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5일 만에 한번씩 조회에 참석하도록 하였으며, 곧 벽상삼한삼중대광 수사공(壁上三韓三重大匡守司空)을 더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죽었다.

성품이 정직하고 엄정하여 일을 처리하는 데 법도(法度)가 있어 국인(國人)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서는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이 있다.

거소에 편액(扁額)하기를 설재(雪齋)라 하고 매일 현사(賢士)·대부(大夫)로 고금(古今)을 의논하니, 벼슬이 대관(大官)에 올랐어도 행동은 서생(書生)과 같았다.

고려 호경대왕(虎景大王:고려 태조의 조상)으로부터 원종까지의 일을 기록한 역사서인 《금경록 金鏡錄》을 찬집하였고, 그밖에 많은 사령(辭令)을 지었다. 충선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姜晉哲〉

나주시(역사 인물)
정가신(鄭可臣)
? ~ 충렬왕24(1298) 초명은 흥, 호는 설재, 본관은 나주 나주시 동강면 양지리 시중 골에서 향공진사 송수의 아들로 출생, 어릴 때 중 천기를 따라 개경에 가서 태부소경 안홍우의 집에서 부양받았고 고종조에 문 과에 급제하여 충열왕 3년(1277)에 보문각대제가 되고 이어 좌 간의대부가 되었을 때 이분희형제가 홍다구에게 붙어서 김방경 을 모함하는 것을 보고 그들과 함께 벼슬하기를 부끄럽게 여겨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얼마후에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서원, 승지, 감찰, 제도안렴사, 별감등을 역임하면서 향리단속 과 민생고(民生苦) 해결에 주력하였다.

 16년(1290)에 민궤와 함께 세자(충선왕)를 수행하여 원나라에 가서 원 세조의 특별한 예우를 받고 돌아와 첨의찬성사가 되고 [천추금경록]을 지었으며 24년(1298) 5월 벽상삼한삼중대광 수 사공에 이르고 그해 6월에 갑자기 병졸하였다.

그 사인에 대해 서 원나라에 보내는 청선위표 (왕위 넘겨주기를 승인신청하는 글)를 지었는데 그 표문의 내용이 왕의 뜻에 거슬린 점이 있었 기 때문에 문책이 두려워서 그렇게 되었다는 설도 있었다.

천성이 정직 단정 엄격하고 문장력이 뛰어나 그 당시 외국으로 보내는 문서가 모두 그 손에서 이루어졌고 높은 벼슬에 있으면 서도 사생활은 서생때와 같았으며 총재가 되어서는 모든 국민들 이 그에게 태평의 치세 이룩하기를 기대했는데 갑자기 죽으니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였다.

문정의 시호가 내리고 충선왕조에 배식하였으며 조선 숙종 19년(1693) 나주에 설재사가 건립되었 다. (고려사열전, 청선고) 

나주정씨(鄭氏)
가문의번영
시조(始祖) 정해의 증손(曾孫) 정가신(鄭可臣·1224~1298년)은 나주(羅州) 사람으로 자(字)는 남헌, 호(號)는 설재(雪齋),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정가신은 나주 동강면 시중동(지금의 인동리)에서 향공진사(鄕貢進士) 정송수(鄭松壽)의 아들로 태어나 금안동에서 자랐다.

어려서 승려 천기(天琪)를 따라 상경하여 1259년(고려 고종 46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고려(高麗) 충열왕 3년(1277년)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가 되고 정녕공에 봉(封)해졌다.

이어 좌사의대부를 거쳐 추서윤으로 필적이 되고 1280년(충열왕 6년) 승지(承旨)가 되었다.

1284년(충열왕 10년) 밀직학사(密直學士)로서 정조사가 되어 원에 다녀 왔으며, 1287년 감찰대부·판삼사사를 역임(歷任)한 후 1290(고려 충렬왕 16년)년 정당문학(政當文學)으로 사의(師儀)가 되어 세자(世子)를 따라 재차 원(元)에 들어갔다.

그 후 성절사로서 3차례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세자이사가 되었으며 그 후로 벼슬이 여러번 승배되었는데 특히 그는 명문장가로서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저술하기도 했으며 청렴(淸廉)결백(潔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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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文獻)
 1.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정가신(鄭可臣)

# 전라도(全羅道) 나주(羅州)
*설재사우(雪齋祠宇)
숙종계유건(肅宗癸酉建).

제향. 정가신(고려 첨의찬성사 시문정 본나주). 신 색(공참 증영의정). 정 식(가신오세손 병판 시경무 본나주). 정 담(호일헌 식현손 정낭 본나주).

祭享. 鄭可臣(高麗 僉議贊成事 諡文靖 本羅州). 申 穡(工參 贈領議政). 鄭 軾(可臣五世孫 兵判 諡景武 本羅州). 鄭 湛(號逸軒 軾玄孫 正郎 本羅州).

 

2. 가문(家門)의 문화유산
설재서원(雪齋書院) :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93호로 전남 나주시 노안면 영평리 649에 있다.

설재(雪齋) 정가신(鄭可臣)을 배향(配享)하기 위하여 숙종 14년(1688) 노안면 금안동에 최초로 창건(創建)되어 현재(現在)는 9위를 향사(享祀)하고 있다.

숙종(肅宗) 19년(1693) 설재 선생의 5세 손으로 세종(世宗) 때에 효자(孝子)정려(旌閭)를 받은 경무공 영모정 정식(鄭軾)이 추배(追配)되었다.

숙종 38년(1712) 여름에는 향사우로 승격되어 설재서원이 되었다.

경종 3년(1723) 노안면 금안동에서 영평리 영안마을로 이건하여 강당인 영모재를 건립(建立)하고, 암헌(岩軒) 신장(申檣·1381~1433)과 후손인 정심(鄭諶)을 추배하여 4위가 배향되었다.

고종(高宗) 5년(1868) 대원군(大院君)의 서원(書院) 철폐령으로 인하여 훼철(毁撤)되었다가 1900년 영모재를 복원(復元)하여 제향(祭享)하다가 1953년 서원(書院)을 복설하면서 이때 창주공(滄洲公) 정상(鄭詳), 정여린(鄭如麟), 정란(鄭瀾)을 추배하고 1988년 삼불의헌공(三不義軒公) 정초(鄭初), 묵재공(墨齋公) 정눌(鄭訥) 등이 추배되어 있다.

건물구성은 사당(祠堂)이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집으로 전면 반칸은 개방되어 있다. 가구는 5량가이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고 전면과 남측면으로는 반칸폭의 퇴를 두었다. 내삼문이 있고, 외삼문 대신 강당 측면으로 4각 대문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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