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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鄭可臣 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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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봉 작성일08-10-21 16:06 조회1,6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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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인 신장(申檣)이 1431년에 지은 鄭可臣의 行狀.(출처: 나주정씨 종친회싸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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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재문정공(雪齋文靖公) 가신(可臣) 행장(1224~1298)75
 
<< 선생의 성은 정(鄭)이며 본관은 나주이다. 처음 휘는 흥(興)이고 왕이 사명(賜名)하여 가신(可臣)이며 설재(雪齋) 또는 무온당(無堂 )은 호이니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증조의 휘는 해(諧)니 군기감 판사로 나주정씨의 시조이고 조(祖)의 휘는 종산(宗産)이니 예빈경(禮賓卿)이요 부(父)의 휘는송수(松壽)니 향공진사(鄕貢進士)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이다.

비는 안의군부인(安義郡夫人) 정씨니 내전숭반(內殿崇班) 선(瑄)의 여(女)이다. 고려 고종 11년 갑신에 나주시 동강면 양지리에서 태어나 시중(侍中)이 되니 동명(洞名)이 시중동이 되었다.
이후로 나주의 금안동(金鞍洞)에서 살았으니 이 동명(洞名) 또한 선생으로 인하여 불려지게 되었다. 금안동에 쌍계정(雙溪亭)과 태평정(太平亭)이 있었으니 모두 선생이 지으셨다.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여 대인(大人 : 인격이 높은 사람)의 뜻이 있었으며 독서능문(讀書能文)에 따를 자가 없었다. 고려 고종 42년 을묘(1255)에 문과에 급제하여 요직을 거쳐 충렬왕 3년 정축(1277)에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가 되고 그 이듬해에 금성산신이무속인의 입을 통해 말하기를 진도와 탐라의 정벌에 나의 힘이 컸거늘 장사(將士)만 상을 주고 나는 록(祿)을 주지 않으니 어찌된 일이냐 나를 반드시 정녕공(定寧公)으로 봉하라 하였다.선생이 그 말을 듣고 왕에게 아뢰어 금성산신을 정녕공(定寧公)으로 봉하고 매년 녹미(祿米)5섬을 나라에서 보내 제사지내도록 했으니 지금까지도 금성산 상봉을 정녕봉(定寧峯)이라 한다.이해 충렬왕 4년(1278)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었을 때 이분희(李汾禧) 형제가 홍다구(洪茶邱)에게 아부하여 김방경(金方慶) 장군을 죄줌에 선생이 이들과 함께 조정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노모(老母)를 위해서라고 집에 돌아갈 것을 왕에게 청하여 윤허(允許)를얻었다.
 이때 영운시(詠雲詩)를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一片從泥上生(일편재종니상생) : 내 한몸을 흙에 묻혀 소박하게 살렸더니
東西南北已縱橫(동서남북이종횡) : 동서남북 종횡으로 벼슬길을 넓혔구나
謂爲霖雨蘇群槁(위위림우소군고) : 가뭄에 단비되어 마른나무 소생케하려 했으나
空掩中天日月明(공엄중천일월명) : 헛되이 중천에서 해와 달만 가리었네
 
5년(1279)에 다시 소환되어 비서윤(秘書尹)으로 시관(試官)이 되어 시부(詩賦)에 백원항(白元恒)등 32인과 명경(明經)에서 정시(鄭時)등 31인의 문과급제와 국자감시(國子監試)에서 2인을뽑았다. 6년(1280)에 승지(承旨)로서 감찰사(監察司)에 있으면서 왕에게 아뢰기를 각도(各道)의안렴사(按廉司 : 고려 때의 지방장관 : 관찰사)의 임무가 관리들의 치적을 살피고 백성의 괴로움을 묻는데 있거늘 함부로 백성들에게서 명주나 가죽 등 귀한 물건들을 거두어 권세가(權勢家)에게 뇌물로 보내는 등 부정을 일삼으니 자신이 부정을 하면서 어찌 바르게 다스릴 수 있으리오. 이들을 모두 색출하여 죄줄 것을 청하였다. 충열왕 16년경인(1290)에 일본이 우리나라의 변방을 침범하니 조정에서는 유사(儒士)에게 총을 들려 이를 막아내려 하니 공이 간(諫)하며, 성덕을 덜까 두렵다하여 왕도 그렇게 생각하고 이 일을 거두었다. 때에 천변(天變)이 있었는데 도장(道場)을 설치하여 불법(佛法)으로 기도로서 물리치려하니 어찌 왕에게 덕을 닦으라고 청하지 않았는가 라고 염승익(廉承益)을 꾸짖었다. 당시에 불도(佛道)가 심하여 경연(經筵)에서 열반경을 강하다가 공이 입시(入侍)하니 정문학(鄭文學)이 오니 빨리 강의를 거두라 하였으니 이로써도 공의 조정에서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때에 공은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도학(道學)이 침체될 것을 우려하여 서경(西京)에 기자묘(箕子廟)를 세웠고 지공거(知貢擧) : (시관)로서 최함일(崔咸一)등 31인의 문과급제자를 뽑았다. 충열왕 17년(1291) 9월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세자2사(世子二師)가 되고 이해에 문무양반가(文武兩班家)에 동성(同姓)간 결혼이 금지되고 외가사촌(外家四寸)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도록 하였다.
 
충열왕 18년(1292)에 세자(世子 : 충선)가 원세조(元世祖)를자단전(紫壇殿)에서 뵙는데 세조가 누워서 묻기를 요사이 무슨 글을 읽었는가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스승인 정가신(鄭可臣) 민지(閔漬)에게서 효경(孝經)과 논어(論語) 맹자(孟子)를 배우며 질문합니다. 하니 세조가 크게 기뻐하며 가신(可臣)과 같이 오라 함으로 이윽고 같이 들어가니 세조가 벌떡 일어나서 관을 쓰면서 세자에게 꾸짓기를 너는 비록 세자이나 나의 외손자이고 저이는 비록 배신(陪臣)이나 대유(大儒 : 큰 선비)인데 어찌 내가 관을 쓰지 않고 있게 했느냐 하고 관을 정제하고 앉아서 고려국의 풍속과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치란(治亂)의 자취를 물으며 오랜 시간을 듣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교지국(交趾國) 정벌을 의논하며 고려의 세자사(世子師) 2인과 의논하라하니 공이 이르기를 “교지(交趾)는 먼 곳에 있는데 먼 곳에 까지 군사를 동원하여 수고롭게 하기보다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종용하고 이에 불복하면 그때 죄를 물어 정벌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하니 세조도 그렇게 생각하고 좋아하며 한림학사가의대부(翰林學士嘉義大夫)를 제수(除授)함에 모든 신하들이 영화롭게 여겼으며 이후로 세조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져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을 보내왔다. 충렬왕 20년(1294) 1월에 원의 세조가 죽으니 王과 공주와 공이 글을 지어 조위하고 성종황제가 즉위하여 고려국이 원나라에 귀부한 때를 물으니 왕은 공으로 하여금 글로써 대답했고 성종의 안전(案前)에 있는 락타새의 알을 두고 글을 지으라하니 공이 즉석에서 이렇게 읊었다.
 
有卵大如瓮(유란대여옹) : 알의 크기가 큰 독과 같으니
中藏不老春(중장불로춘) : 그 속에 불로주를 담았구나
願將千歲壽(원장천세수) : 원컨대 장차 천세토록 살아서
及海東人(훈급해동인) : 그 화열함이 해동에까지 미치게 하소서
 
라고 읊으니 원제(元帝)가 좋아하며 성찬을 내리니 성안의 선비들이 다투어 사귀려했고 세자는 더욱 공을 공경하고 소중하게 대접했다. 일찍이 원제(元帝)가 요동수정도(遼東水程圖)를 보고 바다에 수역(水驛)을 설치하고 공을 하남행성(河南行省)좌승사(左承使)로 임명하여 해운(海運)을 주관케 하려하니 공이 이르기를 “고려의 산천에 산이 10중 7이니 농사와 길쌈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또 고려 사람들이 바닷길에 익숙치 못하여 오히려불편하리라”하여 그 뜻을 막았으니 우리나라의 무거운 짐을 덜게 했다. 충열왕 21년(1295)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에 임명되고 이 때 사향시(思鄕詩)를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海東南有錦城山(해동남유금성산) : 고국의 남쪽에 금성산이 있고
山下吾廬草數間(산하오려초수간) : 그 산 밑에 내가 살던 초가삼간 있네
巷柳園桃親手種(항유원도친수종) : 골목과 뒤안의 버들과 복숭아는 내가 친히 심었으니
春來應待主人還(춘래응대주인환) : 봄이 오면 응당 주인 오기를 기다리겠지
 
원제(元帝)는 공의 고향생각의 뜻을 알고 금안장(金鞍)과 백마(白馬)를 내려 귀국하니 중찬(中贊=侍中)으로 지공거(知貢擧:시험관)가 되어 진사 강훤(姜暄)등 27인에게 급제를 내리고 등용하였다. 충열왕 22년(1296) 세자가 공주의 거처를 크게 지으려고 공사를 일으키니 대한(大寒) 절서인지라 동사자가 생기고 백성들이 노역에 시달림에 백성들의 고역을 덜기위해 공이 아뢰어 일을 멈추게 하였다. 공은 성품이 정직 단엄하고 처사에 밝아 정방(政房)에 있을 때는 매사에 어긋남이 없었고 인물의 등용에도 모두 물의(物議)에 합당했으며 당시의 외교문서가 모두 공의 손을 거치게 되었고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저술하였다. 벼슬이 최고의 자리에 올라도 행동은 서생처럼 검소하니 조야(朝野)에서 태평성대가 올 것을 기대했다. 24년(1298) 무술 3월에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으나 왕은 허락지 않고 5일에 한 번씩이라도 조회에 나오라했다. 또 당시의 교유(交遊)가 모두 명석(名碩)이라 문숙공 김주정(文肅公 金周鼎)과 문현공윤보(文顯公尹珤) 선생이 가장 가까이 지냈으니 시인(時人)이 삼현당(三賢堂)이라 칭했다. 이 해 5월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수사공(守司空)이 더해지고 6월 4일 졸하니 조야(朝野)가 놀라며 애도했다. 예장(禮葬)으로 묘는 경기도(京畿道) 장단군(長湍郡)강동면(江東面) 기곡리(基谷里) 정능동(鄭陵洞) 묘좌(卯坐)에 모셨다. 문정(文靖)이란시호(諡號)가 내려지고 충선왕묘(忠宣王廟)에 배향되었다.
선생의 도학(道學)이 후세에까지 크게 빛났으니 나라에 큰 덕이 되었고 중국에까지 이름이 넘쳤으니 역사에기록이 뚜렷하다. 문의공(文毅公) 찬성(贊成) 백원항(白元恒) 선생이 공에게 드린 시(詩)가 있어 여기에 올린다.(東文選에 실려있음)

位極貂蟬德愈光(위극초선덕유광) : 지위는 시중에 이르렀어도 덕이 더욱 빛나고
經邦妙策勝三章(경방묘책승삼장) : 나라를 다스리는 묘책은 삼장보다 뛰어났네
要令末俗知吾道(요령말속지오도) : 말속으로 하여금 우리 도를 깨닫고 하고
朝退長開萬卷堂(조퇴장개만권당) : 조정에서 물러나와 늘 만권당을 열었네
 
배(配)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죽산안씨(竹山安氏)니 대부소경(大部少卿) 홍우(弘祐)의 여(女)이며 병부랑중(兵部郞中) 세량(世亮)의 손(孫)이고 10월 6일 졸하니 묘(墓)는 공과 종장(從葬)하다. 생(生) 7남 3녀니 장남은 천이(遷怡)로 천태종(天台宗)대선사(大禪師)이며 차남 탁(倬)은 안동(安東) 진주(晋州) 목사를 지내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검교(檢校) 참지정사(參知政事)이었고 자(子)에 1남 1녀를두었다. 3남 전(佺)은 대호군(大護軍)이고 4남은 경부(景孚)니 조계종(曹溪宗) 대선사(大禪師), 5남 길(佶)은 개성소윤(開城少尹)이며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이고 6남 억(億)은 지유장(指諭將)이며, 7남 엄(儼)은 이부상서(吏部尙書)이고 만호(萬戶) 박원굉(朴元宏), 중랑장(中郞將) 임저(林貯) 승상(丞相) 도대(都大)는 사위이다. 손증(孫曾)은 번거로워 다 기록하지 못한다. 오호라! 우리나라에 대현명유(大賢名儒)로 도학을 칭한 자가 수풀처럼 많은데도 고매(高邁)한 인품으론 공을 따를자가 없었으니 왕실(王室)에서 불경을 외우다가 공이 입시(入侍)하면 놀라서 급히 치운 것으로도 공에대한 왕의 돈독한 신임을 알 수 있다. 화인(華人)이 공을 해동부자(海東夫子)라 칭했으나 어찌 해동부자(海東夫子)에만 그치랴! 선생의 재세(在世)에 도(道)가 선생의 마음속에 있었고 선생의 하세(下世)엔 선생의 도(道)가 유자(儒者)의 마음속에 흠뻑 젖게 했으니 더욱 숭상하고 공경할 따름이다.

나는 후학(後學)으로 선생의 고향에 살면서 공을 우러러 사모함이 다른 사람에게 비할 바가 아니나 분수를 모르고 외람되게지었으니 군자(君子)의 입언(立言)을 기다린다.
 
세종 13년 신해(1431)가을 7월 16일
고령후인(高靈后人) 신장(申檣) 근찬(謹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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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피건데 위 행장은 문정공 정가신이 졸한 1298년도로 부터 4대가 흐른
133년 후인 1431년에 지은 글 이므로 구전이 포함되었으리라 여깁니다.
 
행장내용 중 삼현당 부분은
- 당시의 교유(交遊)가 모두 명석(名碩)이라 문숙공 김주정(文肅公 金周鼎)과 문현공 윤보(文顯公尹珤) 선생이 가장 가까이 지냈으니 시인(時人)이 삼현당(三賢堂)이라 칭했다. - 하였으니
그 당시 사람들이 석학(碩學)으로 이름난 위 세 분을 三賢堂이라고 칭송했다는 내용입니다.
 
*문숙공 선조님은 1290년에 63세로 卒(묘지명)하였으니 1228년 생입니다.
 
정가신의 행장 내용에 생갑이 없으나 후손이 모두에 출생년대를 기록한 것으로 여깁니다.
 
정가신의 출생년대는 미상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문화재청의 문화재 자료 제 93호 설재서원(雪齋書院) 편에는
鄭可臣을 1244년 생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 성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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