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학자료

직제학공 김약시 자료(펌)

페이지 정보

작성자 성봉 작성일08-10-05 11:11 조회1,516회 댓글3건

본문

[행장][묘표][시장][증직/증시][모충사 예성 고유문] [음촌 김선생 봉안문][고려명신전][화동충의록 충정공 유사][춘추전채축문][천묘기][연보]


--------------------------------------------------------------------------------


◆ 김약시(金若時)


--------------------------------------------------------------------------------
김약시의 선조는 신라 왕자 흥광(興光)에게서 유래되었다. 신라가 망하게 되자 왕자가 먼저 나라를 떠나 광주(光州)에 가서 그대로 광주인이 되었다.
약시는 우리 태조와 동년에 태어났고 문과에 뽑혀 벼슬이 진현관(進賢館)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약시는 그 부인과 함께 도보로 광주(廣州)에 가서 산골짜기에 나무를 얽어 지붕으로 삼아 겨우 비바람이나 가리우고 살매 사람들이 그의 의관을 괴이히 여겨 이따금 와서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고 혹 주식을 가져다가 대접해도 또한 받지 않았다. 그는 항상 하늘을 쳐다보고 우울해 하며 눈물을 흘리나 사람들은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고 끝내 그의 성명도 알지 못하였다. 태조가 사람을 시켜 물색하여 찾아내어 특별히 성명방(誠明坊)에다 집을 하사하고 수서(手書)로서 송헌(松軒)이라는 어호(御號)를 써서 내렸으니 이는 포의(布衣)의 친구로 대우한 것이다. 또 원래의 벼슬을 주어 기용하려 했으나 약시는 눈뜬장님이라 핑계하고 끝내 명을 받지 않았다.
그는 집안 사람에게 이르기를 『나는 망국대부(亡國大夫)이다. 훌쩍 속세를 벗어나 멀리 도망하지 못하는 것은 선인의 무덤이 이 곳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죽거든 여기에 장사하되 봉분도 하지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하였다. 그가 죽자 그의 말대로 하였다. 뒤에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매양 약시의 일을 일컫고는『김씨 집안에 이인(二仁)이 있다』하였으니 왕자 흥광(興光)과 약시를 가리킨 것이다. 금상(今上:순조) 19년(1819년)에 광주(廣州) 유생(儒生) 유억주등이 상언(上言)하여 증직(贈職)과 사시(賜諡)하기를 청하매 그 일을 해조(該曹)에 내려 대신에게 의논하여 품주 처리케 하였다. 그래서 영의정 서용보, 좌의정 김사복, 우의정 남공철이 모두 『약시의 충절(忠節)은 포미(褒美)하는 은전을 내리는 것이 합당하다』하니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분부하매『이조판서 대제학』을 증직하고 시호를 『충정(忠定)』이라 하였다.



◆ 행장(行狀)


--------------------------------------------------------------------------------
공의 휘(諱)는 약시(若時)이고 호(號)를 음촌(陰村)이라고 하셨다. 나라에서 충정(忠定)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칠십이세(七十二歲)를 수(壽)하셨다.
김씨의 계보는 신라왕자 흥광(興光)에게서 유래되었는데 흥광이 장차 나라가 어지러워 질 것을 알고 광주(光州)에 피하여 은둔하였는데 그대로 그곳이 관향이 된 것이다. 그 뒤 팔대(八代)를 계속하여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고조의 휘(諱)는 사원(士元)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내셨고 시호는 정경공(貞景公)이시다. 비(?)는 복주(福州) 권(權)씨로서 광정대부(匡靖大夫)를 지낸 권윤명(權允明)의 따님으로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이시다. 조의 휘(諱)는 영리(英利)이니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를 지내셨고 비(?)는 남양(南陽) 홍(洪)씨로서 선공시(繕工寺) 부령(副令)을 지낸 홍승연(洪承演)의 따님이시다. 고의 휘(諱)는 정(鼎)이니 보리공신(輔理功臣)으로서 광성군(光城君)에 봉(封)해지셨으며 비(?)는 연안(延安) 이(李)씨로서 전법사(典法司)의 판서(判書)를 지낸 이방(李昉)의 따님으로 숙신택주(肅愼宅主)에 피봉(被封)되셨는데 지원(至元) 원년(元年)인 을해(乙亥)년에 공을 낳으셨다. 공은 삼형제중 셋째로서 형님 두 분(휘 약채·약항)이 계시다. 공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계해(癸亥:1383 고려 우왕 9년)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신 후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셨고 병술(丙戌:1406 태종 6년)년에 졸(卒)하셨다.
공은 대소과에 모두 태종(太宗)과 나란히 합격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태조(太祖)대왕과는 동갑으로서 벼슬길에 나아가기 전부터 교분(交分)이 매우 두터웠다. 그 후 태조가 등극(登極)하게 되자 공은 부인과 함께 걸어서 광주(廣州) 금광리(金光里) 산골짜기에 이르러 나무를 얽어 지붕으로 삼아 비바람을 막고 살았다. 마을 사람들이 그의 의관을 괴이히 여겨 이따금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고 혹은 술과 음식 등을 가져다가 대접해도 받지 않으매 그가 살고 있는 동네를 「부전어동(不傳語洞)」이라고 이름하였다. 항상 하늘을 쳐다보고 비상(悲傷)해 함이 얼굴에 나타나나 사람들은 그의 뜻을 헤아릴 수 없었고 또한 그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태조가 물색하여 그를 찾아내어 원래의 관직을 주고 억지로 벼슬하게 하매 공은 병을 앓아 앞을 보지 못한다고 핑계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태조는 끝내 그의 뜻을 꺽을 수 없음을 알고 대접을 더욱 후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어서(御書)로서 특별히 성명방(誠明坊)의 집 한 채를 하사하고 말미에 임금의 호(號) 송헌(松軒) 두 글자를 써 주었으니 이는 옛날의 교분으로서 대접한 것이다.
일찍이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좋지 못한 시기에 태어나서 종묘사직(宗廟社稷)의 망함을 직접 보고도 죽지 못하고 또 훌쩍 속세를 벗어나 멀리 숨지도 못하는 것은 선인(先人)의 무덤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죽거든 곧 여기에 장사하되 봉분(封墳)도 하지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고 다만 둥근 돌 두 개를 좌우에 놓아 두어 망국(亡國)의 천부(賤?)임을 표시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하였다. 졸(卒)하자 자손이 그의 유명(遺命)을 준행(遵行)하였다. 이조 현종(顯宗)때에 공의 팔대(八代)손인 우형(宇亨)이 승지(承旨)로서 야대(夜對)를 하게되어 공의 유사(遺事)에 관해 언급하였더니 임금이 재삼 찬탄하며『너의 할아버지의 절조(節操)는 가히 기이하다고 할 만 하다.』고 하였다. 아아! 공의 고상한 풍도와 절조는 실로 길야은(吉冶隱) 제공(諸公)들과 대등한데 공은 다만 사적이 민몰(泯沒)되었기 때문이요 후인들이 또 감히 포장천양(褒奬闡揚)하지 못하는 것은 공의 평소의 뜻을 상하게 할까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공의 지조와 절개를 아는 자가 적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주(聖主)의 한마디 말씀의 포장이 가히 백세에 기칠 수 있고 우암(尤菴) 송문정공(宋文正公)이 일찍이 공을 일컬어『신라 고려시대에 미자(微子) 기자(箕子)와 견줄만한 두 어진이가 있다.』하였으니 이는 곧 공의 시조(始祖) 및 공을 가리킨 것이다. 도암(陶菴) 이문정공(李文正公)이 또 공의 묘표(墓表)에서 가로되『한결같은 적심(赤心)은 금석(金石)을 꿰뚫기에 족하고 천지를 통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공의 절의는 여기에서 드러난 것이다. 그 현회(顯晦) 또한 때가 있어서 그런 것인가 ?
부인은 여산(礪山) 송(宋)씨로서 정랑(正郞)을 지낸 송완(宋完)의 따님이고 후취 부인은 원주(原州) 원(元)씨이다. 아들 췌(萃)는 목사(牧使)이고 절(節)은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셋째아들 원우(元祐)는 감무(監務)를 지냈다. 손자 순성(順誠)은 서윤(庶尹) 철성(哲誠)은 감찰(監察) 녹(祿)은 밀직(密直)을 각각 지냈다. 증 현손 이하에도 현달(顯達)한 이가 많으나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는데 그 중에 제학(提學)을 지낸 굉(?) 검열(檢閱)을 지낸 신동(神童) 전적(典籍)을 지낸 세우(世愚) 좌랑(佐郞)을 지낸 세묵(世默) 전한(典翰)을 지낸 규(?) 박사(博士)를 지낸 수(脩) 정랑(正郞)을 지낸 한(?) 부윤(府尹)을 지낸 영남(穎男) 감사(監司)를 지낸 지남(止男) 통례(通禮)를 지낸 위남(偉男) 참판(參判)을 지낸 질간(質幹) 정언(正言)을 지낸 진원(振遠) 판서(判書)를 지낸 우형(宇亨) 장령(掌令)을 지낸 만주(萬胄) 문학(文學)을 지낸 태수(台壽) 정자(正字)를 지낸 성중(聖重) 지평(持平)을 지낸 수석(壽錫) 사간(司諫)을 지낸 화중(和中) 공신록(功臣錄)에 오른 득남(得男) 같은 인물이 있다.
수석(壽錫)이 명중(命重)등과 의논하기를 『우리 선조의 유명(遺命)이 비록 저와 같을지라도 세월이 수 백년 지나갔고 분묘도 다 허물어 졌으니 지금 묘표(墓表)를 세우지 않으면 후손이 또한 어떻게 알겠는가』하고 자그마한 빗돌을 세우고 도암(陶菴)에게 글을 빌어서 기록하고도 천양(闡揚)하지 못하는 것은 공의 명을 어기게 될까 염려해서이다. 연전에 광주(廣州)의 많은 선비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충정공 같은 고상한 절개로서 아직까지 현양(顯揚)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들의 수치이다.』하고 일제히 연로(輦路)곁에서 소리 높이 아뢰어 정경(正卿)으로 증직(贈職)하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또한 역명(易名)의 은전을 내릴 것도 청하여 해조(該曹)에서 복계(覆啓)하여 윤허를 받았으니 성조(聖祖)에서 포장(褒奬)하는 거 는 이에 이르러 유감이 없다고 하겠다.
공의 관력(官歷)과 훌륭한 행실은 세대가 오래되고 사람이 없어서 다만 가전(家傳)의 유사(遺事) 및 도옹(陶翁: 도암 이재)의 갈문(碣文)에 의거하여 가장(家狀)한 통을 만드는 바 이는 당세에 입언(立言)하는 군자의 서술을 격려하고 태상(太常)의 절혜(節惠)의 의논에 도움이 되고저하는 바이다.



◆ 묘표(墓表)


--------------------------------------------------------------------------------
광주(光州)김씨는 신라의 왕자 흥광(興光)에게서 유래가 비롯되었는바 신라가 점차 쇠해가매 왕자께서 미리 피난하시어 광주인이 되시고 그 후손 약시(若時)공께서 고려의 운수가 다함을 당하여 광주(廣州) 금광촌(金光村)에 은둔하면서 『나는 이성계의 신복(臣僕)이 되지 않겠다』하고 나이 칠십이세(七十二歲)에 세상을 마치니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김씨 집안에 두 어진이가 있다』고 하였다. 공은 을해(乙亥)년에 태어나셨으니 태조대왕과는 동갑이시다. 계해(癸亥)년에 과거에 뽑혀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태조가 개국(開國)하매 공은 부인과 함께 도보로 광주(廣州)에 피돈(避遯)하여 산골짜기에 나무를 얽어 지붕으로 삼아 비바람을 가리고 살았다. 마을의 노인들이 그의 의관(衣冠)을 괴이히 여겨 이따금 와서 물어보나 대답하지 않고 혹 주식(酒食)을 공궤(供饋)하여도 또한 받지 않으며 우울하게 상심하며 하늘을 쳐다보고 흐느끼나 사람들이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또한 누구인지는 더욱 알 수 없었다. 태조가 물색하여 찾아내어 성명방(誠明坊)에 있는 집 한 채를 손수 "송헌(松軒: 이성계의 호)이라고 어호(御號)를 써서 하사하였으니 이는 포의(布衣)의 친구로써 대우한 것이다. 뿐 아니라 공에게 원래의 벼슬을 주어 억지로 기용하려고 하였으나 공은 눈뜬장님이라고 핑계하고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일찍이 집안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나라가 망했는데도 죽지 못하고 훌쩍 속세를 떠나 멀리 도망하지 못하는 것은 선인의 묘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죽거든 곧 여기에다 장사하되 봉분도 하지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 다만 돌 두 개를 좌우에 표시해 두어라』하였다. 공이 돌아가시자 자손이 그 말대로 하였다.
현묘조(顯廟朝: 이조 현종)에 이르러 한 번은 승지로 있던 공의 후손 우형(宇亨)이 야대(夜對)에서 임금에게 공의 유사(遺事)에 대해 언급하니 임금이 찬탄하기를 『너의 할아버지의 절조(節操)는 특이하도다』하였다.
공의 세계(世系)는 대제학(大提學) 진(?)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영리(英利) 광성군(光城君) 정(鼎)이니 곧 증조 조부 및 고이시다. 전실 후취 부인이 두 분인데 여산(礪山)송(宋)씨 원주(原州)원(元)씨이다. 자손중에 드러난 인물로는 제학(提學)을 지낸 굉(?) 검열(檢閱)을 지낸 신동(神童) 전한(典翰)을 지낸 규(?) 부윤(府尹)을 지낸 영남(穎男) 감사(監司)를 지낸 지남(止男) 참판(參判)을 지낸 질간(質幹) 우형(宇亨)등 인데 우형(宇亨)은 후에 판서가 되었다.
십대손(十代孫) 대수(垈壽) 명중(命重)과 십일대손(十一代孫) 정언(正言)으로 있는 수석(壽錫)이 의논하기를 『우리 할아버지 무덤에 비석이 없으면 백세 후에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유명(遺命)은 저러하시지만 오래도록 전하게 하는 우리의 할 일이다』하고 드디어 나에게 글을 청해오매 나는 생각하기를 공의 고상한 풍도와 절조는 길주서(吉注書)와 서로 견줄만한데 공은 그 사적이 민몰된 때문에 후세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성상(聖上:현종)의 한 마디 포상은 어찌 부자(夫子):공자)가 태백(泰伯)을 칭찬한 뜻에 감동한 바가 있은 것이 아니겠는가. 은현(隱顯) 또한 다 시기가 있는 것이니 공에게 무슨 가감(加減)될 게 있겠는가 하나의 단심(丹心)이 족히 금석을 꿰뚫고 천지를 통할만 하니 지금 찬양하여 공의 평소의 뜻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고 다만 『고려 직제학 김공 모(某))의 묘』라고 하는 것으로 족하다.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양관대제학 이재(李縡) 찬(撰)
방손(傍孫)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 조택(祖澤) 서(書)



◆ 시장(諡狀)


--------------------------------------------------------------------------------
금상(今上:순조) 십구년(十九年)(1819년) 봄에 광주(廣州) 유생 유억주 등이 어로(御路)에 엎드려 상언하기를 『선행을 찬양하여 풍교(風敎)를 격려하고 충성을 포상하여 윤상(倫常)을 부지하는 것이 곧 아조(我朝)의 치국(治國)하는 법도인데 전조(前朝)를 위해 절조를 지킨 지사에 있어서는 사가(史家)가 그 이름을 쓰지 못하여 세상에 그 일을 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혹 절혜(節惠)로 표장(表章)하기도 하고 조두(俎豆)로 은덕을 갚기도 하여 모두 정몽주. 길재등 제현(諸賢)과 함께 이름이 전해지니 아아 훌륭한 일입니다. 신(臣)이 사는 고을에 김약시(金若時)라는 분이 있었으니 고려의 일민(逸民)입니다.』하고 이어서 도암(陶菴) 문정공 이재(李縡)가 찬술한 묘표(墓表)중의 말을 인용하여 공의 세벌(世閥) 환적(宦蹟) 절의를 충실하게 하고 말미(末尾)에 또 말하기를 『신 등은 이 사람(김약시)의 옷과 신발을 소장하고 있는 고을에서 생장하여 그 절의가 우뚝함을 우러르는 반면에 그 절의가 민몰(泯沒)됨을 슬퍼하는 바이므로 삼가 목욕재계하고 상주(上奏)하오니 증직(贈職)과 사시(賜諡)하는 은전을 베푸시와 성덕을 사론(士論)에 부응하여 주소서』하였더니 그 일에 해당 관서에 내려 대신의 의논에 의해 처리하게 하였다. 그래서 의정부 영의정 서용보, 좌의정 김사목 우의정 남공철등이 모두 『약시(若時)의 충절은 포미(褒美)하는 은전을 내리는 것이 합당합니다』하니 대신들의 의논에 의해 시행하도록 분부하매 드디어 공에게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경연(知經筵) 의금부(義禁府) 춘추관(春秋館) 성균관사(成均館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을 증직하니 많은 선비들이 귀를 솟구어 듣고 이 거조로 격려됨이 있다고 하였다.

삼가 상고하면 다음과 같다.


공의 성은 김씨이니 신라왕자 흥광(興光)에게서 유래되었다. 장차 신라가 망할 것을 미리 알고 광주에 은둔하여 그대로 광주(光州)사람이 되었다. 공의 증조의 휘(諱)는 진(?)이니 대제학(大提學)이고 조의 휘(諱)는 영리(英利)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를 지냈다. 그리고 고의 휘(諱)는 정(鼎)인데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다. 공이 태어난 것은 고려 충숙왕 사년(四年)(을해 1335년)인데 이는 태조대왕의 출생(出生)년이기도 하다. 1383년(계해 우왕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진현관(進賢館)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자 그의 부인과 함께 도보로 광주(廣州)에 피하여 산골짜기에 나무를 얽어서 지붕을 삼고 겨우 비바람을 가리우고 살았다. 마을 사람들이 그 의관을 괴이하게 여기고 이따금 와서 물어봐도 대답치 않고 혹 주식(酒食)을 가져다 대접해도 또한 받지 않았다. 항상 하늘을 쳐다보고 우울해 하며 눈물을 줄줄 흘리나 사람들은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었고 끝내 그 성명조차 알지 못하였다. 태조가 사람을 시켜 물색해서 찾아내어 특별히 성명방(誠明坊)의 집 한 채를 하사하고 친필로 "송헌"(松軒:이성계의 호) 이라고 써서 주었는 바 이는 포의(布衣)때의 친구로 대우한 것이다. 태조가 또한 공의 원래의 벼슬을 주어 기용하려고 하였으나 공은 눈뜬장님이라 핑계하고 끝내 명에 따르지 않았다. 공이 집안 사람에게 이르기를 『망국의 대부(大夫)로서 훌쩍 속세를 벗어나 도망치 못하는 것은 선조의 묘소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죽거든 여기서 장사지내되 봉분도 하지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고 하였다. 돌아간 후 과연 자손들이 그 말대로 하였다. 현종(顯宗)조에 이르러 한 번은 공의 후손인 승지(承旨) 우형(宇亨)이 야대(夜對)에서 공의 사적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현종이 이를 듣고 찬탄하기를 『너의 할아버지의 충절은 참으로 특이 하도다』하였으니 성조(聖祖)의 이 한마디 말씀은 부자(夫子:공자)가 태백(泰伯)을 칭송한 의의에 감동된 바가 있은 것인가. 일찍이 들으니 우암(尤菴) 송선생이 자주 공의 일을 칭찬하여『김씨 가문(家門)에 두 어진이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왕자 흥광(興光)과 공을 가리킨 것이다. 공의 후손 중에 드러난 이로는 제학(提學) 굉(?) 검열(檢閱) 신동(神童) 전한(典翰) 규 부윤(府尹) 영남(穎男) 감사(監司) 지남(止男) 참판(參判) 질간(質幹) 우형(宇亨) 등인데 우형(宇亨)은 나중에 판서(判書)가 되었다.』
공철(公轍)이 일찍이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을 지을 적에 길재(吉再) 조견(趙?) 남을진(南乙珍) 원천석(元天錫) 서견(徐甄) 및 공을 얻어서 일민(逸民)에 열기(列記)하였다. 길재는 문하주서(門下注書)로 고려의 국운이 다함을 당하여 벼슬하지 않고 선산(善山)에 숨어살았다. 조견의 이름이 견(犬)부를 따른 것은 나라가 망했는데도 스스로 죽지 않음은 개와 같다는 뜻에서이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지리산에 들어가 한 평생을 마쳤다. 남을진은 태조 잠저(潛邸) 때의 옛 친구였다. 태조가 즉위하여 그를 꼭 기용해서 쓰려고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않으매 주상이 그의 지조를 가상히 여겨 그가 살고있는 곳을 봉하여 사천백(沙川伯)으로 삼았다. 원천석과 조견이 처음 원주와 금천(衿川)에서 은둔에 은둔하매 당시 사람들이 망명한 것으로 알고 죄주려고 하니 주상이 이르기를 『이는 백이(伯夷) 숙제(叔齊)와 같은 사람이다』하고 모두 용서하고 죄를 묻지 않았다. 또 두문동(杜門洞) 제현(諸賢) 약간을 알아내어 아울러 책편에 붙였다.
아아! 고려를 혁명할 때에 절의를 온전히 하여 이름을 성취한 선비가 많았건만 정인지(鄭麟趾)가 고려사(高麗史)를 지을 적에 다 빼버리고 싣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성조의 본의 이었겠는가. 당시 제현들의 혐의가 이미 깊었는데 그 사람으로 하여금 민몰(泯沒)되어 전하지 않게 하면 장차 어떻게 후세를 흥기시켜 권면(勸勉)하겠는가. 슬픈 따름이다. 지금 공의 13대손인 인서(人敍) 우서(禹敍)등이 와서 시장(諡狀)을 청하는 지라 공철(南公轍)이 이미 조정에 헌의하고 또 제공들의 일을 끝머리에 실어서 아울러 전하고자 하는데 말하는 이는 시장(諡狀)을 두고 역사(歷史)라 하니 말뜻을 아는 자라고 하겠다. 삼가 시장을 쓴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남공철은 찬한다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右議政 兼 領經筵事 監春秋館事 南公轍은 撰한다



◆ 증직(贈職)


--------------------------------------------------------------------------------
전조(前朝)의 진현관(進賢館) 직제학(直提學) 김약시(金若時)를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의금부사(義禁府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춘추관(春秋館) 성균관사(成均館事)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의 직(職)에 추증(追贈)함.



◆ 증시(贈諡)


--------------------------------------------------------------------------------
충정공(忠定公). (임금을 섬겨 절의를 다한 것을 충(忠)이라 하고 행실이 전일(專一)하여 어긋나지 않는 것을 정(定)이라 한다) 충도(忠度) 의절(毅節).



◆ 모충사 예성 고유문(慕忠祠禮成告由文)


--------------------------------------------------------------------------------
운운(云云) 후학(後學) 성명(姓名)은 선현(先賢) 충정공(忠定公) 김선생께 감히 밝게 고하나이다.
엎드려 아룁건데 고려의 운수가 다할 제 선생이 태어나셨네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신복(臣僕)이 되지 않았으니 포은(圃隱) 목은(牧隱)과 이름을 가지런 하도다. 태조가 잠저(潛邸)때의 친구라 하여 강호(江湖)에 물색하여 찾아냈으나 정충(貞忠)으로 광주(廣州) 한 구석에서 숨어살았도다. 부전어동(不傳語洞)에서 우물우물 스스로 지조를 지키고 성명방(誠明坊)의 하사(下賜)한 집 끝내 받지 않았도다. 도암(陶菴)이 충(忠)을 찬양하고 우암(尤菴)이 인(仁)을 허여(許與)했네 백세(百世)의 사표가 될만한되 어찌 제향(苾芬)이 없을 손가. 시호(諡號)를 내리고 서원(書院)지어 정표(旌表)하니 은례(恩禮)가 함께 내려졌네 사당(祠堂) 지을 겨를 없는 것은 한스럽기만 하도다 이 바닷가는 공의 살던 곳은 아니지만 자손들이 대대로 살매 조선(祖先)의 영혼이 쉬는 바가 되었도다. 하물며 현철한 손자 매죽(梅竹:김득남)이 있어 은거(隱居)했네 사당 짓고 단(壇) 모았던 유허(遺墟)가 물가에 있도다 충의(忠義)의 높은 절개는 할아버지의 덕을 잘 계술(繼述)했고 아름다운 덕행은 배향(配享)하여 마땅하도다 예의가 엄숙하매 시사(時祀)가 끊임없네 아아 선생은 영원토록 이르소서. 정일(丁日)에 박전(薄奠)을 올리네 많은 선비 뜰에서 그 사유 고하도다.



◆ 음촌 김선생 봉안문(陰村 金先生 奉安文) 幷實蹟


--------------------------------------------------------------------------------
선생의 휘(諱)는 약시(若時)이고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광성군 정(鼎)의 아들이다. 태조와 동갑이며 태종과는 동방(同榜)이다. 벼슬이 진현관(進賢館)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고려가 망하고 이조가 개국하자 광주(廣州) 금광리(金光里)에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태조가 포의(布衣)때의 친구라 하여 물색하여 찾아내었으나 공은 눈뜬장님이라 핑계하고 나서지 않으매 태조는 그를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성명방(誠明坊) 한 구역의 집을 하사(下賜)하되 친필로 송헌(松軒)이라고 써서 주었다. 선생은 스스로 포신(逋臣)이라 하여 끝내 살지 않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다. 중국에 들어가는 그의 형 척약재(?若齋: 약항(若恒)를 전송하는 시(詩)에,




중국에는 아직도 노련(魯連)의 제(齊)나라가 있는데
바다로 뛰어드는 지금엔 서쪽으로 갈 것 없네
뇌수에는 백이(伯夷) 일컫는 사람 없는데
고사리 캐며 부르는 노래 목 메여 꿈 마저 아득하여라




하였다. 시호(諡號)는 충정(忠定)이다.
고려 말엽의 비사(秘史)는 광성군(光城君)에게서 나왔네 신씨(辛氏)아닌 왕씨(王氏)이니 통사(統嗣)가 분명하도다. 광성군의 아들이 바로 선생이신데 선생이 계술(繼述)하여 의기가 등등(謄謄)하도다 개국한 초기에 광주에 은둔하니 포의 때의 친구라 하여 태조가 물색하여 불렀도다 선생은 나서지 않고 눈뜬장님 핑계했네 하사한 집 살지 않고 외로이 북으로 떠나 두문동으로 들어가니 천추에 좋은 이름이었네 중국가는 형 전송하며 노중련(魯仲連)을 배우려했고 백이 숙제의 고사리 캐며 부르던 노래 소리 귓전에 들리는 듯 목이 메어 눈물이 줄줄 ..... 아아 선생은 명가(名家)의 효자이고 고국(故國:고려)의 충신이시네 하늘이 두문동을 열어 놓으니 욕의(縟儀)가 새롭도다. 술과 과일로써 공손히 제사 올리도다.
(두문동(杜門洞)서원지(書院志) 둘째 권)



◆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
사영(思穎) 남공철(南公轍) 저술)


--------------------------------------------------------------------------------
슬프도다 고려가 망하자 절의를 지켜 이룬 선비가 많았으나 역사에서 많이 빠져버리고 전하지 않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일민(逸民))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와 우중(虞仲)과 이일(夷逸)과 유하혜(柳下惠)와 소련(小連)이다』하고 또 이르기를 『그 뜻을 굽히지 않으며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은 백이와 숙제이다』하고 유하혜와 소련을 두고 이르되 『말이 의리에 맞으며 행동이 생각에 맞다』하고 우중과 이일을 두고 이르되 『은거(隱居)하여 말을 함부로 하나 몸이 청도(淸道)에 맞으며 폐(廢)한 것이 권도(權道)에 맞다』하였다. 대저 백이와 숙제는 성인이시라 인(仁)을 구하여 인(仁)을 얻었고(求仁得仁) 유하혜 소련 우중 이일은 혹 자신을 굽히고 영합하기를 구하지 않아 말이 의리에 맞으며 행동이 생각에 맞은 이도 있고 혹 청(請)하여 더럽히지 않고 권도로 하되 적의(適宜)한 이도 있기 때문에 일민(逸民)이라 하여 그들을 허여한 것이니 일(逸)이란 유일(遺逸)이다. 예로부터 충신 의사는 흔히 발란반정(發亂反正)할 때에 나오는 것인데 표창하여 일컬을 만한 이가 매우 적은 것이 이상스럽다. 생각건대 당시에 혐의가 이미 깊었고 또 공자 같은 성인 군자가 백이 숙제 우하혜 소련 우중 이일은 칭찬하듯 함을 만나지 못하여서이지 과연 그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고려가 혁명되자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여 자신을 깨끗이 한 이가 있고 목숨을 버리어 절의를 지킨 이도 있으니 이것이 이른 바 일민(逸民)이다. 성인(聖人)이 용비(龍飛)함에 호걸들이 구름처럼 따라 순종하면 탈이 없고 뜻을 달리하면 일컬음이 없으니 이런 때에 홀로 우뚝이 서서 두려워하지 않기가 어려운 것이다. 내가 십이(十二)인을 얻었으니 남을진(南乙珍) 조견(趙?) 길재(吉再) 임선미(林先味) 조의생(曹義生) 원천석(元天錫) 서견(徐?) 김사렴(金士濂) 김약시(金若時) 차인부(車仁?) 김제(金濟) 김주(金廚)이다.
시퍼런 칼날을 밟고 죽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관직이 없는 자는 살아도 마음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데도 조용히 의리에 죽으니 남의 녹을 먹으면서 머리를 굽히고 욕되게 사는 자에게 비교하면 어떠하겠는가? 내가 또 두 사람을 얻었으니 차원부(車原?) 정문충(鄭文忠)이다. 사적을 기록할 적에 또 두문동(杜門洞) 제현(諸賢)중에 절의를 위해 죽은 이(立?)와 자신의 지조를 지킨 〈自靖〉이 약간인을 얻어 책편에 실었다. 그런데 성명은 전하지 않고 사적만 野乘과 傳記에 나오는 자는 이처럼 빠뜨린 자들이 많음을 애석히 여기고 겨우 책에 나타난 것이면 내가 泯沒시키지 않고 나타내니 이는 세상의 인신(人臣)된 자로 하여금 감동 하는 바가 있게 하는 동시에 또한 역사의 빠진 것을 보충하려는 것이다. 이에 일민전(逸民傳)을 짓는다. (제12권) (중간 생략)



◆ 화동충의록(華東忠義錄)
충정공(忠定公) 유사(遺事)


--------------------------------------------------------------------------------
김약시(金若時)는 광산인(光山人)이다. 고려조에 벼슬하여 관직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태조가 즉위하게 되자 공은 부인과 함께 도보로 광주(廣州) 산골짜기에 가서 나무를 얽어 지붕으로 삼아 비바람을 막고 근심하고 답답해하며 하늘을 쳐다보고 흐느끼나 사람들이 그 속을 헤아릴 수 없었고 또한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태조가 물색(物色)하여 그를 찾아내어 집을 하사하고 포의(布衣)의 친구로 대접했다. 그리고 원래의 관직을 주어 억지로 기용하려 하니 공이 청맹(靑盲)이라 핑계하고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일찍이 집안 사람에게 말하기를『내가 나라가 망하였는데도 죽지 않고 또 훌쩍 세속을 벗어나 멀리 은둔하지 못하는 것은 선인(先人)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죽거든 장사하되 봉분도 하지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고 돌 두 개를 좌우에 놓아두어서 표시나 하라』하였다. 그래서 공이 죽게 되자 그 말대로 하였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 춘추전채축문(春秋奠菜祝文)


--------------------------------------------------------------------------------
운운(云云) 후학(後學) 성명(姓名)은 충정공(忠定公) 김선생께 감히 밝게 고하나이다. 삼가 생각컨대 선생은 고려를 위해 신복(臣僕)이 되지 않으셨네. 마음은 천지를 통하고 충성은 금석을 꿰뚫도다 태조가 여러 번 불러도 나서지 않으매 성명방(誠明坊)의 집을 하사하셨네. 또 시호 내려 표창하고 서원지어 제향(祭享)하니 은례(恩禮)가 융숭하도다. 이에 중정(仲丁)을 만나 내가 그 조촐한 제수(祭需)를 올리고 현손(賢孫) 매죽헌(梅竹軒)을 선생에게 배향(配享)하나이다. 상향(尙饗)



◆ 천묘기(遷墓記)


--------------------------------------------------------------------------------
향수(享壽) 칠십이년간(七十二年間)을 오로지 충절(忠節)로 일관(一貫)하신 충정공(忠定公) 할아버지께서 『죽은 후에 봉분(封墳)도 비석(碑石)도 세우지 말고 다만 둥근 돌 두 개 만을 좌우(左右)에 세워 망국(亡國)의 천부(賤?)임을 표시(表示)하라』고 하신 유언(遺言)을 어길 수 없어서 공의 묘소(墓所)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상태로 삼백여년을 내려왔다. 그러나 삼백여년 동안 풍우(風雨)에 시달린 공의 묘소(墓所)가 이제는 그 자취조차 찾기 힘들게 되어가매 1727년(영조3년 정미(丁未) 9월에 10세손 대수(垈壽), 명중(命重). 11세손 수석(壽錫)등이 의논하기를 『비록 선조(先祖)의 유명(遺命)이 그렇기는 하지만 세월이 수백년 경과하여 분묘(墳墓)도 다 허물어졌으니 이제 묘표(墓表)를 세우지 않는다면 후손(後孫)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하고 도암(陶菴) 이재(李縡)가 찬(撰)하고 방손(傍孫) 조택(祖澤)이 서(書)한 비석(碑石)(곧 지금의 구비(舊碑)을 세우게 되었다.
이후 충정공(忠定公) 할아버지의 세일사(歲一祀)도 매년 음(陰)10월 초6일로 완정(完定)하고 이날 각처에 산재(散在)거주(居住)하는 제자손이 모여 봉향제(奉享祭)한 후 묘하(墓下)에서 경선숭조(敬先崇祖)하고 돈종목족(敦宗睦族)해오기 다시 250유여(有餘)년이 되었다. 그러던 중 서기 1969년부터 충정공(忠定公) 할아버지의 묘역(墓域) 부근 일부가 정부의 국토개발사업에 따라 성남(城南)시가(市街)로 선정(選定) 개발(開發)됨으로써 반천여년을 자리잡아온 이곳을 떠나 천묘(遷墓)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천묘위원회(遷墓委員會)를 구성(構成)하고 각처로 순회(巡回) 구산(求山)하기 수삭(數朔)에 현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삼합리 산50번지의 1호지를 선정 매수(買收)하게 되었는바 우연(偶然)의 일치인지 아니면 이제야 기록(機綠)이 닿았음인지 각처(各處)를 탐구(探求) 끝에 선정(選定)매득(買得)한 이 산은 바로 충정공(忠定公)할아버지와 관계(關係)가 깊은 산(山)임을 알게 되었다. 즉 그곳 부락주민들 사이에 구전(口傳)되어 온 전설(傳說)에 의하면 남향(南向)하고 있는 산(山)과 마주하는 산(山)은 고려조(高麗朝) 공민왕(恭愍王)께서 피거(避居)하신 산(山)이므로 『공민산(恭愍山)』이라고 칭(稱)한다는 것이며 그 산(山)기슭에 있는 샘은 어수(御水)를 올렸다 하여 『국정포(國井浦)』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오직 고려조(高麗朝)를 위해 충절(忠節)을 지키신 공께서 생전(生前)에 숭봉(崇奉)하시던 바로 그 공민왕(恭愍王)의 피거지인 공민산(恭愍山)과 마주하는 위치(位置)에 유택(幽宅)을 정하게 되시매 비로소 안택(安宅)을 찾으신 것 같아 자손으로서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뿐만 아니라 충북 괴산에 거(居)하는 19대손 대수(大洙)가 계좌(癸坐) 정향(丁向)에 재혈작광중(裁穴作壙中)할새 지중(地中)에서 『대길지(大吉地)』라고 쓴 선인(先人)표시(表示)의 사기(砂器)표물(表物)이 발견(發見)되었다. 너무도 신기한 일이 벌어진 순간 웅성거리던 주위는 정적(靜寂)함 그대로였다. 그러나 잠시 후 전설(傳說)과도 같은 이 일이 꿈 아닌 현실임을 깨달은 제자손과 인부(人夫)들은 박장(拍掌)탄성(歎聲)하여 왈(曰)『물각유주(物各有主)라더니 바로 이곳이야말로 광산김씨 충정공(忠定公)의 천만년유택명당지지(千萬年幽宅明堂之地) 아닌가』원근(遠近)은 칭송(稱頌) 또한 자자(藉藉)한 가운데 면봉우안장치산(緬奉于安葬治山) 그러나 이곳에 충정공(忠定公)의 유택(幽宅)을 옮겨 정한 후 나타난 길조(吉兆)는 그 분이 아니었다. 즉 천묘(遷墓)에 따라 구산(舊山)인 광주군 중부면 단대리 금광동에 수(竪)하였던 구비(舊碑)를 특별함으로 아울러 이수(移竪)하였던 바 이끼가 끼고 진애(塵埃)가 묻혔던 구비(舊碑)가 명당(明堂)중 대명당지지(大明堂之地)에 시봉(侍奉)함에서인지 이수(移竪) 후 보석(寶石)과도 같이 광채(光彩)를 발하고 풍화작용(風化作用)으로 불명(不明)하던 음기(陰記)또한 선명(鮮明)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한편 천묘(遷墓)후 위토(位土)를 즉시 장만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광주(廣州)거(居) 춘수(椿洙)가 불편(不便) 초조(焦燥)한 가운데 자진(自進)성의(誠意)로 수년간 추일사(秋一祀) 제수(祭需)를 봉래(奉來) 제향(祭享)을 봉행(奉行)하여 오던 중 이제는 위토(位土) 또한 매수(買收)구득(求得)하고 재실(齋室:경모재(景慕齋)도 신축(新築)준공(竣工)하게 되었다.



◆ 연보(年譜)


--------------------------------------------------------------------------------


신라왕자 흥광(興光)의 19대손(代孫)으로서 광성군(光城君) 정(鼎)과 숙신택주(肅愼宅主) 연안이씨(延安李氏) 이방(李昉)의 따님사이에 제3남으로 태어나시다. 호(號) 음촌(陰村)

1382년 (우왕(禑王) 8년 임술(壬戌) 47세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시다.

1383년 (우왕(禑王) 9년 계해(癸亥) 48세 대과(大科)에 급제하시다.
이조 태종대왕과 동방(同榜) 그 뒤 벼슬이 진현관(進賢館)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다.

1392년 (이조 태조원년 임신(壬申) 57세 고려가 망하자 부인과 함께 도보로 광주(廣州) 금광리(金光里)에 은둔하시다.

1393년 (조선 태조2년 계유(癸酉) 58세
태조가 포의(布衣)의 정의(情誼)로서 백방으로 공이 계신 곳을 물색하던 중 금광리에 은둔중이신 것을 알아내고 한양 성명방(誠明坊)의 집 한 채를 어서(御書)로서 송헌(松軒:이성계의 호)이라고 써서 하사했으나 공께서는 이를 거절하시다.

1406년 (태종6년 병술(丙戌) 72세
『죽은 후에 봉분(封墳)도 하지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고 다만 둥근 돌 두 개만을 좌우에 세워 망국(亡國)의 천부(賤?)임을 표시하라』고 유언하시고 12월 4일 졸(卒) 하시다. 향수(享壽) 72세. 배(配) 여산송씨(礪山宋氏)와 원주원씨(原州元氏) 췌(萃) 절(節) 원우(元祐)의 아드님 세 분을 두시다.

1660년경 (이조 현종(顯宗)때)
8대손 승지(承旨) 우형(宇亨)이 야대(夜對)에서 공의 유사(遺事)를 말하자 임금(현종)이 『너의 할아버지의 절개는 참으로 특이하다』고 찬탄하다.

1727년 (영조3년 정미(丁未) 9월)
10대손 대수(垈壽) 명중(命重)과 11대손 수석(壽錫)등이 의논하여 『비록 선조의 유명(遺命)이 그렇기는 하나 세월이 수백년 지났고 분묘도 다 허물어졌으니 묘표를 세우지 않으면 후손이 알 수 있겠는가』하고 빗돌을 세우다(도암(陶菴) 이재(李縡) 찬(撰)하고 조택(祖澤:방손) 서(書)하다.

1819년 (순조19년 기묘(己卯) 봄)
유억주등 광주(廣州) 유생(儒生)들이
『충정공처럼 고상한 절개를 지닌 분이 아직까지 현양(顯揚)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수치라』하고 임금 행차길 곁에서 일제히 소리 높여 아뢰다. 이에 순조 대왕은 정경(正卿)으로 증직하라는 명을 내려 해당관서에서 대신이 의논에 다라 처리케 하니 영의정 서용보, 좌의정 김사목, 우의정 남공철등이 약시(若時)의 충절을 포미(褒美)하는 은전을 내림이 합당하다고 합의하고 왕께 건의하다.

1819년 (순조19년 기묘(己卯) 5월 7일 정묘(丁卯)
전조(前朝) 직제학을 지내신 공에게『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지경연 춘추관 의금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의 증직이 내려지다.
동년 9월 7일 병인(丙寅)
13대손 인서(人敍) 우서(禹敍)가 청하여 남공철(南公轍) 공의 시장(諡狀)을 지음.
이 해에 공의 유적이 남공철의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 일민(逸民)조에 수록됨.

1820년 (순조20년 경진(庚辰) 3월 11일 기묘(己卯)
시망(諡望)에 하비(下批)하여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의 공에게 :충정(忠定)의 시호 내려짐.

1829년 (순조 29년 기축(己丑)
매곡사당(梅谷祠堂)을 건립하여 매죽헌(梅竹軒) 득남(得男)과 함께 향사(享祀)함.

1868년 (고종 5년 무진(戊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 철폐 정책에 따라 매곡사당 철훼(撤毁)됨. 매곡단(梅谷壇)만 설단.

1920년 경신(庚申)
경향(京鄕)의 종의(宗議)와 도내(道內) 유론(儒論)의 향응으로 구단(舊壇) 서편에 모충사(慕忠祠)를 건립 향사(享祀)하니 경의당(景義堂)이 바로 이것이다.

※ 병진파보(丙辰派譜)에는 공민왕(恭愍王) 을해(乙亥)(1359년)생으로 되어 있으나 임술보(壬戌譜)(1922년 간행)에 지원(至元) 원년(元年)이라고 한 것이라든지 또는 태조대왕(太祖大王)과 동경(同庚)이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1335년(충숙왕 복위4년 을해(乙亥))이 옳다. 아울러 임술보(壬戌譜)에 향년(享年) 69세라고 한 것도 착오이며 72세이다.


댓글목록

과객님의 댓글

과객 작성일


위 자료에 김약시가 1406년 (태종6년 병술(丙戌)에 72세에 졸하였다 하였으니  김약시의 출생년도는
1335년생이 명백하고 김약시의 위로 김약채, 김약항 두 형이 있으니 김약항은 1332년 경생이며
김약채는 1329년경 생이므로 김약채는 김영리의 아들인 김정(1329년생)과 같은 해에 출생했으며
김영리는 14세에 손자를 낳았다는 주장이니 판군기감사공파의 족보 기록은 엉터리임이 증명되었다.

지나가다님의 댓글

지나가다 작성일

1335년에 출생한 김약시의 묘갈은 1680년에 출생한
도암 이재 가 지었으니 그는 김약시 보다 345년 후대에 출생한 사람으로
김약시의 후손들이 전하는 구전에 의존해서 묘갈문을 지었으리라 여긴다.

광김님의 댓글

광김 작성일

묘갈문에 생갑이 기록되어 있어 의심할바 없다고 생각했는데 ...
그렇다면 묘갈문은 한참 후대에 추정에 의한 기록물로서 믿을만한
고증은 되지 못한다 생각해도 될려는지요.

보학자료 목록

게시물 검색